지난 5년간 수퍼 호황을 지속했던 한국 반도체 산업에 불안한 전조(前兆)가 나타나고 있다.

주력 메모리 반도체인 D램과 낸드플래시의 가격이 1분기 이후 하락세를 보이는 데다 증권가에서는 4분기 이후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크게 꺾일 것이라는 분석 보고서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여기에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반도체를 양산해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자동차·철강 등 다른 주력 산업의 부진 속에서도 한국 경제를 떠받쳐왔던 반도체 산업이 하강 국면으로 접어든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대만의 반도체 전문 시장 조사업체인 D램 익스체인지에 따르면 23일 DDR4 8Gb(기가비트) D램의 현물(現物) 가격은 개당 7.9달러로 올 1월 9.65달러 수준에서 18%나 떨어졌다. 지난 4월 9달러 선이 무너진 데 이어, 지난 18일에는 8달러 선까지 무너졌다. 낸드플래시(64Gb 제품 기준) 가격 역시 올해 초 4달러에서 3.3달러로 17.5% 하락했다. 현물 가격은 실제 시장에서 매일 거래되는 반도체 가격을 실시간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향후 장기 계약 가격의 추이를 예측할 수 있는 주요 지표다.

이처럼 주력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모두 20% 가까이 급락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5년간 메모리 반도체는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열풍을 타고 급성장했지만 서서히 그 끝이 보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난 5년간의 반도체 호황은 이전과 비교해 오랜 기간 지속돼 왔기 때문에 당장 꺾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 속에 23일 한국 양대(兩大) 반도체 기업이자 시가총액 1·2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나란히 하락했다. 삼성전자의 주가는 4만6500원으로 전날보다 2% 하락했고, SK하이닉스의 주가는 8만1700원으로 전날보다 7% 넘게 급락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국내 한 증권사가 향후 실적 악화를 반영해 목표 주가를 대폭 하향 조정한 것이 결정타였다.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는 이유는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는 주춤한 반면 공급이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D램과 낸드플래시 수요의 40% 이상 차지하는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올해 1.4%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고 PC 시장도 정체 상태다. 그나마 클라우드(가상 저장 공간) 시장 확대에 따라 서버(대용량 컴퓨터)용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증가하고 있지만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SK하이닉스도 연내 충북 청주의 신규 제조라인 M15를 조기 가동할 예정이다. 메모리 반도체 공급량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중국산 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발언으로 미·중 간 무역 분쟁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불안한 요소다.

◇세계 반도체 시장, 곧 정점 찍는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오는 3분기에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세계 4위 D램 업체인 대만의 난야는 최근 2분기 실적 발표를 하면서 D램 업황이 3분기에 고점을 찍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메모리 반도체의 확장세가 서서히 끝나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시장 영향력이 큰 해외 투자은행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전망치를 잇따라 하향 조정하고 있다. 미국의 투자은행 JP모건은 지난달 말 보고서에서 올해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20조5030억원을 기록해 정점을 찍지만, 내년에는 11조6600억원으로 반 토막 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골드만삭스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영업이익이 올해 48조9400억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내년 45조3700억원, 2020년에는 43조8600억원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에 비해 범용 제품이 많은 SK하이닉스가 가격 하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發 저가 반도체 러시 시작되는 내년이 더 심각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올 하반기 낸드플래시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양산에 돌입하면 가격 하락세는 더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중 무역 분쟁으로 전반적으로 반도체 시장이 위축될 우려가 큰 상황에서 공급량은 대폭 늘어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국영 반도체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의 계열사인 YMTC를 비롯해 허페이창신, 푸젠진화반도체 등은 올 하반기부터 낸드플래시와 D램 생산에 돌입한다. 중국 정부에서도 2025년까지 자국 반도체 수요의 70%를 자급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000억달러(약 113조4500억원)가 넘는 펀드를 조성해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선 상태다. 중국 법원은 지난 3일 자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양산에 앞서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에 기술 침해를 이유로 판매 금지 조치까지 내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당국이 자국 기업의 시장 진입을 위해 사전 조치로 마이크론 판매 금지 결정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면서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하면서 자국(自國) 기업을 대상으로 한 중저가(中低價) 제품 시장을 상당 부분 잠식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진입을 막기 위해 한국 기업들이 먼저 물량 공세를 단행해 가격 하락세를 주도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기업들에 타격을 주기 위해 상대방이 백기를 들 때까지 가격 경쟁을 벌이는 치킨게임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급격한 반도체 하강 국면을 맞이하더라도 기술적으로 경쟁 업체에 1년 이상 앞서 있는 삼성전자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