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분당 서울대병원을 찾아 의료기기 분야의 규제 혁신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낡은 관행과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해 우리 의료기기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우뚝 서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줄곧 노동계 편에 섰던 문 대통령은 취임 1년여 만에야 사실상 첫 혁신성장을 위한 현장 행보를 보였다. 이날은 정부가 반기업 친노동 소득주도성장 실험의 참담한 결과를 인정한 다음날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작년 하반기부터 1년 넘게 일자리 창출에 쏟아부은 돈은 37조원이다. 37조원이면 100만명에게 연간 3700만원씩 나눠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런데도 올해 상반기(1~6월) 취업자 증가수는 14만2000명에 불과했다. 작년 상반기 36만명의 40%에도 못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최악의 고용한파다. 일자리 창출을 국정과제 1호로 내건 문 대통령으로선 참사(慘事) 수준의 성적표다.

결국, ‘최저임금 후폭풍’에도 3% 성장을 고집하던 정부는 불과 반년 만인 지난 18일 성장률 전망치를 2%대로 낮췄다. 취업자수 증가 전망치는 32만명에서 반토막 수준인 18만명으로 내렸다. 지난 5월 발표된 올해 1분기 소득통계에선 최저임금 16.4% 인상에도 최하위 20%의 소득이 되레 8% 줄고 최상위 20% 소득은 9.3% 늘어 통계 작성 이후 소득격차가 가장 컸다. 집권 1년여가 지난 지금 일자리와 성장, 분배라는 세마리 토끼를 모두 놓쳐버린 급진적 시장개입 경제정책의 허상이 드러났다.

더 암담한 것은 그럼에도 정부의 하반기 경제정책 기조에서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다. 소득주도성장 실험을 계속 밀어붙이기 위해 나라의 곳간을 헐어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에 직격탄을 맞은 저소득 취약계층에 돈을 대거 뿌리는 분배 정책을 쏟아냈다. 최저임금 후폭풍 수습용이라는 비판을 받을만 했다.

반면 거듭된 반기업 친노동 정책에 잔뜩 주눅 든 기업의 기를 되살리는 과감한 규제혁파 혁신성장은 또다시 선언적 구호에 그쳤다. 경제진단에선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곡학아세(曲學阿世)나 다름없다. 두 자릿수 최저임금 인상의 2년차가 되는 내년이 더 걱정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실험 1년 만에 사실상 실패작으로 판명났다. 한국 경제의 구조와 현실을 외면한 채 무턱대고 도입한 소득주도성장 실험은 경제 생태계를 파괴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애꿎은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생의 ‘을(乙)과 을(乙) 전쟁'으로 번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대표적이다.

지난 6월 기준 우리나라 자영업자는 688만명(무급가족종사자 118만명 포함)이다. 고용인구(2712만명) 4명중 1명(25%) 꼴이다. 10% 안팎인 선진국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초래된 부작용이 광범위하게 퍼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 중에서도 350만명의 영세 자영업자는 더 열악한 한계 상황에 몰렸다. 그 결과는 폐업 아니면 고용 축소다.

모범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정부가 반기업 소득주도성장을 전면 수정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활성화의 주체인 민간 기업을 신명나게 뛰게하는 혁신성장에 올인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인 대립적 노사관계를 대타협의 길로 이끄는 묘안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대규모 투자 여력과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대기업을 적폐 대상이 아닌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동차 조선 등 흔들리는 제조업의 경쟁력을 되살려 수출 전선을 재정비하고 4차산업혁명과 연관한 혁신적인 투자도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반도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지금과 같은 착시 경제는 한순간에 민낯을 드러낼 수 있다. 중국이 반도체 육성에 100조원을 투입하며 쫓아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글로벌 무역전쟁의 파고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기득권과 실타래 같은 규제의 벽에 막혀 있는 의료, 관광, 교육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의 활로도 반드시 뚫어야 한다. 작년 한해동안 우리 국민 2650만명이 해외여행을 가서 33조원을 쓰고 왔다. 이제 우리도 영리의료법인을 허용하고 관광시설도 고도화해 외국인들이 뭉칫돈을 쓰고 갈 수밖에 없는 고차원의 내수 보완책을 만들어야 한다. 면세점에서 남의 나라 기업이 만든 명품이나 파는 것에 만족해선 안된다.

근본적으로 경제체질을 바꾸고 일자리를 늘리는 이런 대전환이 시작돼야 한국 경제는 다시 희망가를 부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문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여당의 줄기찬 반대로 국회에서 수년동안 발목이 잡힌 규제개혁 법안을 하루빨리 처리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문 대통령의 행보에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는 조심스러운 평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동안 규제개혁에 무관심했던 장관들도 원격진료 도입과 같은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관건은 문 대통령이 내로남불 수준에 머무는 여당의 강성 의원들을 비롯해 노조, 시민단체와 같은 지지층을 설득하거나, 반발을 무릅쓰고 규제혁파를 위해 정면돌파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다. 기적 같은 희망을 버리고 싶진 않지만 어려운 일일 것이다. 벌써 진보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시민단체에선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 등이 후퇴할 조짐을 보인다며 촛불정부의 소임을 다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9일 의료기기 분야의 규제 혁신을 약속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구를 위한 규제이고,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문 대통령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더는 ‘소귀에 경읽기' 정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