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의 대부분을 소득주도성장을 위한 ‘분배 정책’으로 채웠다. 내년부터 근로자와 자영업자가 있는 저소득 가구에 세금 환급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근로장려세제(EITC)의 대상자와 지급액을 각각 두 배로 확대해 지원 규모를 연 1조1416억원(2017년 기준)에서 3조8000억원으로 대폭 늘리기로 했다.

소득이 하위 20%인 약 150만명 노인(만 65세 이상)의 기초연금도 당초 계획보다 2년 앞당겨 내년부터 30만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졸업 후 2년 내 구직 활동을 하는 청년(만 18~34세)에게는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일 경우 월 50만씩 6개월 구직 수당도 지급한다. 저소득층 가구, 청년, 노인, 영세 자영업자 등 저소득층과 취약계층 지원에 2조~3조원의 재정이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일자리 감소와 저소득층 소득 감소 부작용을 세금 퍼붓기로 만회하려고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년도 최저임금 10.9% 인상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소상공인을 달래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도 포함됐다.

반면 정부는 민간의 성장 동력 확충을 위한 혁신성장에 대해선 추진 과제만 나열하며 뚜렷한 정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가 ‘소득주도성장-혁신 성장-공정 경제’를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활성화의 지름길인 혁신성장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재부 관계자는 “이번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은 저소득 지원 대책을 같이 발표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득 주도 성장에 치우친 것처럼 보인다”며 “혁신성장은 향후 별도로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 않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 대부분 재정 투입 통한 분배…혁신 성장은 2페이지 분량

기획재정부가 18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및 저소득 지원 대책’은 국민 세금인 재정을 투입해 취약 계층인 저소득 가구, 노인, 청년의 소득 개선과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을 주로 담았다.

일을 하지만 소득이 적은 가구에 현금을 지원하는 EITC의 대상자와 지급액은 내년에 두 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대 지급액이 단독 가구는 현행 연 85만원에서 150만원, 홑벌이 가구는 200만원에서 260만원, 맞벌이 가구는 25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각각 인상된다. EITC는 지난해 기준 약 157만 가구가 혜택을 받았는데 내년엔 두 배 이상인 약 300만 가구가 지원금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매년 수조원의 추가 재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내년부터 약 7만명의 저소득층이 추가로 기초생활제도의 생계급여도 받을 수 있다. 현재는 가족 중에 부양 의무자가 있으면 생계 급여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부양 의무자가 중증 장애인이나 노인이고, 부양 의무자가 있는 가구의 소득이 하위 70%인 경우에는 생계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내년 4인 가구 기준 생계급여는 월 약 138만4000원이다.

60세 이상 노인이 소유한 주택(9억 이하)을 담보로 매월 연금을 받는 ‘주택 연금’의 대상자도 확대된다. 내년부터 보유한 주택을 전세로 임대할 경우에도 주택 연금 가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는 소상공인들을 달래기 위해 결제 수수료 인하, 카드 수수료 산정 체계 개편도 약속했다. 최저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보전해 주는 일자리안정자금도 연장해 내년에도 3조원 규모 내에서 시행하기로 했다. 소상공인에 대한 고용보험료 지원 대상과 지원 금액도 확대할 방침이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 활성화의 지름길인 과감한 규제 완화를 통한 혁신성장에 대해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두 페이지 분량의 혁신 성장 정책은 대부분 검토 과제로 채워졌다.

정부는 하반기 중 규제 혁신안을 마련한다고 밝혔으며, 규제샌드박스 5법을 연내 입법화하겠다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규제 혁신을 위해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해 주거나 유예해 주는 제도로 연초 부터 정부가 언급했던 내용이다.

정부는 또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업종별 혁신과 국가 투자 프로젝트를 선정해 추진하겠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최근 제조업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인 자동차 산업 침체에 대해서도 “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만 명시했다. 미래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공유 경제와 관광, 의료 산업에 대해서도 다음달 대책을 내놓겠다는 계획만 밝혔다.

연합뉴스

◇ EITC 확대 “최저임금 인상 전 확대했어야…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

정부가 혁신 성장은 외면한 채 국민 세금인 수조원의 재정을 투입해 최저임금 인상 부작용에 대한 뒷수습에 나섰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표적인 것이 EITC 확대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공약을 지키기 전에 효과는 비슷하지만 고용 시장에 미치는 부작용이 적은 EITC를 먼저 확대한 후 최저임금 인상률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두 정책을 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반대로 최저임금부터 올려놓은 후 일자리 감소와 저소득층 소득 감소의 부작용을 수습하기 위해 EITC를 대폭 확대하는 꼴이 됐다.

최저임금과 EITC는 모두 일을 해도 소득이 적은 계층을 지원하는 제도다. 그러나 최저임금은 고용주가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는 반면 EITC는 정부가 저소득 근로자 및 영세 사업주의 실질 소득을 높여주는 제도다. 따라서 최저임금 보다 EITC가 고용 시장에 미치는 부작용이 적다.

정부는 EITC 확대로 크게 세 가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직격탄을 맞은 1~2분위(소득 하위 40%) 가구와 영세 자영업자 가구의 소득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또 민간 기업의 임금을 세금으로 보완해 준다는 비판을 받는 일자리안정자금을 EITC로 대체해 그 규모를 점진적으로 줄이겠다는 생각이다. 장기적으로는 최저임금 인상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EITC를 확대해 내후년 이후 최저임금 인상의 속도를 조절해 보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정부는 내년 소상공인과 영세 중소기업에 대해 최저임금 인상분을 보전해주는 일자리안정자금도 3조원 이내 규모로 시행할 예정이다. EITC 규모까지 확대할 경우 현금 보조 정책에만 수조원을 투입하게 된다.

유경준 전 통계청장(현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은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기 전에 최저임금과 EITC 제도를 적절하게 조합해 인상 속도를 조절했어야 했다"며 "EITC도 직업이 없는 빈곤층을 구제할 수 없고, 재정 지출 부담과 대상자 근로 의욕 감소, 부정 수급 등의 단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만능 해결책이라고 보지 말고 최저임금, 사회 보장성 강화, 각종 복지 제도 등의 정책과 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