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에 공시하면 다른 기관투자자들은 눈치를 보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은 국민연금이 경영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 압박감을 느낄 때 비로소 대화에 성실히 임할 겁니다."

국민연금공단의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재계·학계·자산운용업계·시민단체 등 각계를 대변하는 전문가들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국민연금기금 스튜어드십코드 도입방안 공청회’에 참석해 격론을 벌였다.

토론자들은 투명하고 독립적인 주주활동을 통한 국민연금 기금의 장기 수익성 제고라는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취지에는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세부 방안에 대해서는 각자가 속한 단체의 이익이나 철학에 따라 의견을 달리 했다.

17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도입방안 공청회에서 좌장을 맡은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왼쪽에서 일곱번째)이 토론 진행 순서를 설명하고 있다.

◇ “의결권 방향 사전공시, 다른 투자자에 영향”

이날 재계 입장을 전하기 위해 참석한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전무는 “기업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무조건 반대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기준이나 규정을 기업 현실에 맞게 정해주고 재계 입장을 들어준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전무는 “그러나 현재 정부가 내놓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방안은 애매하고 모호한 부분이 많아 기업 입장에서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측면이 있다”며 “예컨대 ‘재직할 연수가 과도하게 장기인 자에 대해서는 사외이사 선임을 반대할 수 있다’고 명시했는데 이런 모호한 기준은 기업을 고민에 빠뜨린다”고 주장했다.

정 전무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기업 주주총회 전 미리 공시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국민연금이 찬반 여부를 사전에 공시하면 다른 투자자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이 내용은 논의를 더 해야 한다”고 전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과대학 교수는 한국의 기업 경영 환경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를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비경영자의 경영 참여를 논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나라 경영권자가 경영권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며 “외국 헤지펀드 등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국내에 마련돼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진정으로 스튜어드(집사)가 되려면 기금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기준으로 보상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며 “또 정치 권력으로부터 어떻게 분리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독립성 확보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가 민간 전문가 중심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만들고 여기에 참여하는 위원들로부터 서약을 받겠다는데, 그 수준 이상의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선DB

◇ “국민연금 경영 참여해야…운용사에 의결권 위임 안돼”

도입 신중론을 주장한 이들과 달리 일부 전문가들은 이날 공개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도입방안 내용이 좀 더 공격적이어도 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정용건 연금행동집행위원장은 정부안에 경영 참여에 관한 내용이 모두 빠진 것과 관련해 “주주가 주주권을 행사한다는 데 그걸 못하게 하면 안 된다”며 “공공기관과 금융권 등 현재 주주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라도 국민연금이 경영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초 정부는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안에 이사 선임·해임, 감사 추천, 정관변경 제안, 주총 소집 요구 등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기업 길들이기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저항에 결국 경영 참여 관련 내용을 뺐다. 정 위원장은 “국민연금이 집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아무 것도 안하는 주주권이 무슨 의미인가”라고 지적했다.

이찬진 변호사는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에 의결권을 위임하는 방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국민연금이 모든 의결권을 직접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방안에 내년부터 위탁 자산 45.9%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민간 운용사에 넘긴다는 내용을 담았다. 국민연금의 과도한 영향력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려는 조치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도 “국내 상당수 자산운용사가 재벌과 연계돼 있다”며 “그들에게 의결권을 넘겨준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류 대표는 “재계에서 스튜어드십코드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도둑이 제 발 저려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