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에 있는 KT 인터넷 데이터센터(IDC)는 2016년 한 해에 1억8000만킬로와트시(kWh)의 전력을 소비했다. 이는 4만8000여 가구의 전력 소비량과 비슷한 규모다. 이곳에서는 수만대의 서버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필요한 에너지도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려면 결국 전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2030년에 필요한 전력 수요를 예측하면서 2년 전에 예측했던 것보다 오히려 전력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봤다.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으로 전력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안정적인 기반시설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4차 산업혁명 에너지 소비 증가 가져올 것”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에너지 수요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대체로 에너지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이지순 서울대(경제학과) 명예교수는 "4차 산업혁명과 관계가 깊은 기계, 수송기기, 상업, 공공공서비스 부문이 발전하면 에너지 소비가 늘고 에너지 집약도 악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특히 (이들 부문의 발전은) 전력 증가를 야기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청정에너지(신재생에너지) 공급망 확충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선진국들은 에너지 시장에 대한 민간의 참여를 활성화해 신재생에너지 산업과 IT 융복합 에너지 산업의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에너지 산업에 대한 과도한 정부규제와 독점구조로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혁신적이고 수요 분산형인 에너지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황일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는 현재의 에너지 정책이 4차 산업혁명으로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감당해낼지에 대해 "택도 없다"고 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공장의 모든 게 자동화되고 인공지능(AI)과 슈퍼컴퓨터가 돌아가 전력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했다.

문승일 서울대 교수(전기공학)는 “정부가 산업구조를 적절하게 개편하고 전기요금, 에너지 요금체계를 합리적으로 만들면 4차 산업혁명으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맞춰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에너지 요금 산업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전력수요를 맞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요금체계 개선이 이뤄져야 에너지전환도 현실화되고 수요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력 전남 나주 본사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소

◇ 정부, 오히려 최대 전력 수요 전망치 내려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 인공지능 등의 발전으로 전력 수요는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정부는 2030년에 필요한 전력 수요를 오히려 낮췄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표한 8차(2017~2031년)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30년 기준 최대 전력수요를 100.5GW로 전망했다. 이는 2년 전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짤 때 예상했던 113.2GW와 비교하면 11%(12.7GW) 낮은 수치다. 최대 전력수요 예측이 이 정도로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최대 전력수요를 계산할 때 전기차만 반영하고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과 관련한 개별 기기의 전력사용량은 반영하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이 충분히 진전되지 않아 전체 수요를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현재 200만대인 세계 전기차가 2040년엔 2억8000만대로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전력수요 예측이 뒤바뀐 이유는 탈원전 정책을 추진할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탈원전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낸 전문가를 아예 연구에서 배제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까지 최대 전력 사용량은 2006년 58.9GW에서 2016년 85.1GW까지 계속 증가했다. 정부는 원전 대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를 늘렸다고 하지만, 자연조건에 따라 수급이 불안정한 신재생에너지가 원전을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2040년까지의 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에너지 정책 비전을 수립하는 '3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확정한다. 에너지기본계획은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 따라 5년마다 수립하는데 3차 계획 기간은 2019~2040년이다. 이것이 전력수급기본계획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3차 에너지기본계획 총괄분과위원 중 상당수가 문재인 대통령 대선캠프에 참여했거나 작년 12월 확정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참여했던 인물이라 제대로된 계획이 세워질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홍상현 호주 타스마니아 대학교 과학공학기술학부 교수는 "한국은 불리한 지리적 조건, 이웃 국가와는 고립된 전력 연결망, 높은 인구밀도, 집중된 경제활동으로 재생에너지를 높이는 길이 매우 험난하다”며 “전력 생산의 최대 에너지원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아직 정부가 발표한 로드맵을 되돌리기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DB

◇ 겨울에 이어 여름에도 연이어 빗나간 정부의 전력 수요 전망

정부의 최대 전력 수요 전망도 연이어 빗나가고 있다. 정부가 에너지 수급 계획을 ‘탈원전’ 정책에 맞춰 수립하면서 전력 수요를 낮게 예측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4차 산업혁명으로 전력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가운데, 단기 전망마저 빗나가면서 탈원전 정책과 잘못된 전력 수요 전망이 전력 수급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5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정현안조정 점검회의에서 '여름철 하계 수급계획'을 밝히며 올여름 최대 전력 수요는 8830만㎾로 예상했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8차 전력계획에서 밝힌 올여름 최대 전력 수요 8750만㎾보다 80만㎾ 늘어난 수치다.

산업부는 "역대 여름철 최대 전력공급 여력을 확보해 안정적인 전력수급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지난해 여름보다 전력 공급능력이 개선되는 것은 가동 원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에는 원자력발전소 8기가 정비로 가동 중단됐지만, 올해 여름에는 6기만 정비가 예정돼있다. 결국 정부 스스로가 전력 수요가 급증할 때는 원전 가동을 늘릴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지난겨울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8차 전력계획에서 지난해 겨울 최대 전력 수요를 8520만㎾로 예상했지만, 한파로 지난겨울 실제 최대 전력 수요는 연이어 전망치를 넘어섰다. 지난 2월 5일에는 8725만㎾를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정부는 전력거래소와 계약을 맺은 기업들에 전기 사용 자제를 요청하고 그만큼을 금전으로 보상해주는 수요 감축 요청(DR)을 총 10차례 진행했다. 급전 지시는 한마디로 전력 예측 기본 계획이 틀어졌다는 이야기인데, 급전 지시를 받은 기업은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사무실 난방기를 끄는 식으로 전기 사용을 줄여야 한다.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결국 정부가 전력수요가 몰릴 때는 원전을 가동을 늘려야 하는 것을 인정한 것 아니냐"며 "정부가 탈원전 정책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 수요를 낮게 예측해놓고 수요감축 요청만 남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