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도 그 돈은 전부 다락방에 들어가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2000년대 초 일본 경제학자들이 1990년부터 지속된 장기 불황의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해 격론을 벌인 끝에 내놓은 말이다. 정부가 아무리 재정·경제 정책을 내놔도 내수 시장에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 후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면서 일본의 장기 불황은 고령화로 생산 가능 인구(만 15~64세)가 줄면서 경제 자체가 활력을 잃었고, 정치적 리더십 부재로 지속적인 경기부양책을 펴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일본은 1994년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중 14%)에 진입하면서 이듬해부터 생산 가능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20년 새 일해서 돈 벌어 소비하는 인구 1000만명이 사라졌다.

노인이 된 일본인들은 지갑을 닫았다. 급기야 정부가 돈을 쓰라며 국민에게 공짜로 상품권까지 나눠줬다. 그런데도 내수 경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품권을 할인된 가격에 팔아 저축하는 일이 벌어졌다. 남주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단 장기 불황의 터널에 들어가면 소비 심리는 극도로 위축돼 백약(百藥)이 무효였다"고 말했다. 노인 부양을 위한 사회적 비용 증가로 재정 부담을 진 청년들 지갑은 더욱 얼어붙었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의 총리는 거의 매년 교체돼 일관된 정책을 펼 수도 없었다. 국가부채 줄이기 등 고통을 수반하는 장기적인 개혁 정책이 나오지 못한 이유다. 지금 일본 경제는 호황이다. 양적 완화와 재정 지출 확대, 기업 체질을 바꾸는 구조 개혁이라는 '세 개의 화살'을 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013년부터 '불황 탈출'을 목표로 각종 정책을 꾸준하게 밀어붙인 덕분이다. 고령화 저출산이 불황을 초래할 수 있지만, 불황 탈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남 교수는 "정부는 내수·수출 간 불균형 성장을 해소하는 경제 정책을 펴고, 기업은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미래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