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사이의 경쟁을 촉진하고 담합 등 불공정행위를 처벌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정작 기업들의 불공정행위가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분석하는 경쟁정책 전문가들을 홀대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공정위의 판사 역할을 하는 비상임위원에 공정거래법, 경쟁정책 전공자 대신 중소기업, 소비자보호 등을 전공한 교수들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갑(甲)의 횡포를 막고 을(乙)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면서 취임한 김상조 위원장이 ‘시장경쟁 촉진’이라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문재인 정부 코드 맞추기에 더 열중하는 모습이 비상임위원 인선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30일 세종시 관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5일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와 양세정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를 임기 3년의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임명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6월 14일 취임식에서 직원들과 인사하고 있는 모습. 김 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을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공정거래위원장이 제청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정위 비상임위원은 공정거래법 등을 위반한 기업 등에 대한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 전원회의 구성원이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 공무원 출신 상임위원 3인, 외부 전문가 출신 비상임위원 4인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대규모 유통사업자법, 표시광고법 등 공정위가 관장하는 법률을 위반한 기업 등 사업자에 대한 법적 제재 수위를 결정하기 때문에 사실상 1심 법원 기능을 한다. 공정위 비상임위원은 재판부의 판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공정위 비상임위원은 판·검사 출신 변호사와 공정거래법 전공 법학 교수, 경제학 전공 교수 등으로 채워졌다. 이정희, 양세정 교수 외에 검사 출신 김봉석 변호사와 판사출신 윤현주 변호사 등이 공정위 비상임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관례적으로 경제학 전공 교수 몫인 비상임위원에는 기업의 불공정행위가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산업조직론 전공 교수들이 주로 임명됐다. 특히 한국산업조직학회장 출신 중견 학자들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난 25일 이정희 중앙대 교수와 양세정 상명대 교수를 공정위 비상임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이 같은 인선 기준과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정희 교수는 중앙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클라호마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학 교수이기는 하지만 경쟁정책과 연관된 산업조직론 전공자는 아니다. 중소기업학회장, 동반성장위원회 공익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양세정 교수는 고려대 경제학과, 통계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소비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소비자문화학회장, 한국소비자학회장, 소비자권익포럼 공동회장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5월 31일 SK브로드밴드와 위탁 계약을 맺고 인터넷망 설치·애프터서비스(AS)·영업 등을 담당하는 협력업체 대표들이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앞에서 SK브로드밴드 자회사 편입을 거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법에 정통한 한 로펌 관계자는 “이 교수와 양 교수 모두 이론적 전문성은 있지만 공정위가 관장하는 하도급법와 소비자기본법 등에 대해 전문성이 있다고 평가받는 분들은 아니다”면서 “경쟁정책 전문가가 아닌 분들을 비상임위원으로 임명하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인선을 김상조 위원장의 ‘코드 맞추기 인사’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을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면서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공정위는 프랜차이즈 가맹본부의 갑질 근절,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하도급 거래 정상화 등에 매진했다.

하지만 공정위의 핵심 분야인 담합 등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한 사건처리 건수는 2016년 265건에서 지난해 196건으로 감소했다. 공정위 제재의 가장 높은 수위인 고발과 과징금부과 건수는 하도급법 위반 사건의 경우 2016년 각각 5회, 27회에서 지난해 7회, 37회로 늘었지만 불공정 거래행위 사건에서는 같은 기간 3회, 12회에서 2회, 10회로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공정위가 위법성 입증이 까다로운 담합 사건보다 처벌이 손쉬운 하도급법, 가맹사업법 위반 사건에 적극적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익명을 요청한 경쟁법 전공 교수는 “공정거래법이나 경쟁정책 전문가가 아니라 중소기업·소비자학 전공 교수를 비상임위원에 임명한 것은 공정위가 경쟁정책보다는 중소기업·소비자 보호 등에 매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면서 “가뜩이나 불공정 거래 행위 관련 위법성 입증 등에 대한 공정위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 인선 여파를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