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 못 하는 스마트 콘택트렌즈 - 포스텍 한세광 교수팀이 개발한 스마트 콘택트렌즈. 실시간으로 당뇨 환자의 혈당을 측정하고 약물까지 투여할 수 있지만, 의사의 대면 진단·치료만 인정하는 의료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출시가 불가능하다.

포스텍 신소재공학과 한세광 교수는 지난해 콘택트렌즈 기업 인터로조와 공동으로 '스마트 헬스케어 콘택트렌즈'를 개발했다. 이 렌즈는 당뇨 환자의 눈물에 포함된 당 농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한다. 혈당 수치가 올라가면 렌즈 표면의 코팅이 자동으로 녹아내리면서 약물도 나온다. 2015년 인터넷 기업 구글이 개발했던 스마트 콘택트렌즈가 혈당 수치 감지만 가능했던 것과 달리 즉각적인 처방까지 가능하다. 인터로조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세계적 기술 기업을 육성하겠다며 진행하고 있는 '월드클래스 300' 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이 스마트 콘택트렌즈는 정부 예산까지 개발비로 쓰였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출시가 불가능하다. 의료법에서 의사와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단·처방을 받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연구소장은 "혁신적인 신(新)기술이 나와도 팔지를 못하는데, 누가 개발을 하려고 하겠느냐"면서 "정부가 섣불리 기술의 가치를 평가하기보다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규제를 풀어주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산 넘어 산' 규제에 갇힌 한국

미국 IBM이 개발한 AI 의사 '왓슨'은 전 세계 수십만편의 논문과 환자 기록을 비교해 환자에 최적화된 진단과 치료법을 추천해준다. 미국 최고의 암 병원인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센터 의료진과 왓슨의 암 진단은 90% 이상의 일치도를 보인다. 하지만 가천대 길병원 등 국내 병원 7곳에 도입된 왓슨은 한국에서는 초보 의사보다도 실력이 떨어진다. 한국 의료진과 왓슨의 진단 일치도는 50% 수준에 불과하다. 길병원 관계자는 "인종(人種)에 따라 약효나 증상 등이 다른데 왓슨에 학습시킬 한국 환자 데이터가 부족해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왓슨과 같은 AI 시스템을 의료기기로 허가하지 않고 검색 도구로 분류했다. 왓슨 진단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왓슨이 한국 환자를 학습할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의료기기 스타트업 뷰노 본사에서 직원들이 인공지능 기술로 엑스레이 화면 속 뼈 나이를 분석하고 있다.

국내에서 개발된 AI 의료 시스템도 사정이 비슷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16일 의료용 AI 스타트업 뷰노가 개발한 의료영상 분석 프로그램 '뷰노메드 본에이지'를 2등급 의료기기로 허가했다. AI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뼈의 나이를 판독해 아동의 성조숙증·저성장을 진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AI 의료기기가 허가를 받은 것은 국내 처음이다. 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에서 쓰이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높다. 건강보험 지급 여부와 금액을 결정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보험 급여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길게는 수년씩 걸린다. 김현준 뷰노 전략이사는 "현행법상 의료기기는 심평원 심사를 의무적으로 거쳐야 한다"며 "식약처가 팔아도 된다고 허가했는데 심평원 심사를 또 받아야 하는 전형적인 이중 규제"라고 말했다.

◇세계 최초 기술 개발해도 고사 위기

AI 의료가 국내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혁신 의료 기기들이 복잡한 의료 규제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는 사례가 이전에도 수없이 많다. 의료기기 업체 메인텍은 2010년 세계 최초로 실린더식 의약품 주입 펌프 '애니퓨전'을 개발했지만, 아직까지 국내 병원에 단 한 개의 제품도 팔지 못했다. 이상빈 메인텍 대표는 "실린더식 펌프는 70년 전 개발된 기존 펌프의 치명적인 약점인 약물 주입 오작동을 해결한 제품"이라며 "대통령상·국무총리상까지 받았지만 식약처 판매 허가를 받는 데만 5년이 걸렸고, 심평원은 여전히 애니퓨전을 의료기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신기술 의료기기 허가는 매년 줄고 있다. 2013년 120건이던 허가 건수는 작년 26건까지 감소했다. 혁신적인 의료가 발붙일 자리가 한국에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