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김덕한 특파원

로봇과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단순 반복형 작업은 이미 로봇이 상당 부분을 대체했고, 주식·채권 트레이더, 회계사 같은 전문 직종까지 AI가 인간의 능력을 앞서고 있다는 경고가 끊이지 않는다. 앞으로 수십 년 안에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거의 가져갈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더 암담한 것은 일단 이렇게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새로운 노동의 기회조차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런 추론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놀랍게도 많은 산업 현장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을 몰아내고 있는 게 아니라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곳곳에서 자동화 이후 채용은 더 늘어

먼저, 자동화가 인간의 일자리를 오히려 늘려주고 인간의 생산성을 높여준다는 조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데이빗 아우터 교수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의 안나 살로몬스 교수는 최근 "자동화로 사라지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주장했다. 자동화에 따라 기존과 다른 기능을 필요로 하는 업무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자동화가 가격을 떨어뜨리고 제품의 품질을 높여 아시아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한 수요를 촉발함으로써 3400만개의 일자리가 추가로 생겼다"고 밝혔다.

컨설팅 업체 딜로이트는 지난해 노동력 연구 보고서에서 "영국에서 지난 15년 동안 진행된 자동화가 콜센터 등 저숙련 서비스 일자리 80만개를 없애버렸지만 같은 업종에서 고숙련 일자리 350만개를 창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늘어난 일자리는 사라진 일자리보다 임금 수준도 높아 연봉 기준으로 1만3500달러를 더 많이 받는다고 설명했다.

독일에 있는 유럽경제연구소도 지난달 "로봇과 자동화 기술이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면서, 독일의 산업 고용이 오는 2021년까지 1.8%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로봇과 인간의 분업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5일 '로봇 혁명과 조화를 이루는 대기업들' 제목의 기사에서 로봇을 투입해 생산 자동화를 이룬 후, 생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채용이 늘어난 기업 사례를 소개했다. 단순하고 위험한 업무를 로봇에 넘겨준 뒤에는 사람들이 좀 더 창의적인 업무, 검사 같은 제품 품질을 높이는 업무, 복잡한 문제 해결 등에 시간을 더 쓸 수 있게 됐으며 이것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시키고 채용도 늘렸다는 것이다.

WSJ는 독일의 자동차 부품 기업 보쉬가 자동화 비율을 높이면서도 제품의 품질을 점검하는 데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한 사례를 소개했다. 2011년 로봇 설비를 한 대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140대까지 늘렸고, 지난해 근로자도 2만명을 더 뽑아 지금은 전 세계 근로자가 40만명에 달하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독일 자동차기업 BMW의 스파튼버그 공장은 지난 10년간 자동화 설비 투자를 늘려 연간 생산 능력을 40만대로 두 배 이상 증가시켰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근로자 수도 4200명에서 1만명으로 역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늘어난 인력은 좀 더 복잡해진 자동차 부품의 공정을 점검하고 개선하는 데 투입됐다. 3000개 정도의 부품이면 만들 수 있었던 자동차가 요즘은 1만5000개 이상의 부품이 필요한 복잡한 제품이 됐기 때문에 자동화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테슬라는 지나친 자동화에 발목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전기차 메이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최고경영자)는 지난달 자신의 트위터에 테슬라 최초의 보급형 양산(量産) 차종인 '모델3'의 생산 차질이 지나친 자동화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테슬라는 최근 자동 주행 장치로 운행 중이던 차량이 충돌 사고를 내고 배터리마저 폭발해 운전자가 사망한 후 각종 악재가 겹치며 고전 중이다. 6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월가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테슬라는 앞으로 2년간 100억달러(약 10조8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려울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테슬라 위기의 핵심은 무엇보다 '모델3'의 생산 차질이었다. 지난해 여름, 모델3 출시 이후 머스크는 연말부터 주당 5000대 수준으로 생산 속도를 높이겠다고 했지만 그 시기는 올해 3월, 또 6월로 계속 늦춰졌다. 지난해 3분기에 고작 260대를 생산했고, 4분기에도 2425대 생산에 그쳐 40만명에 달하는 전 세계 예약 고객들이 언제 전기차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생산 차질의 원인이 머스크의 '이상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동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용접, 도색, 차체 작업 등에 한정되는 로봇 자동화를 조립, 검수에까지 모두 적용하면서 '생산 병목현상'이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공장 전체가 멈추는 일이 반복되면서 생산 속도는 '수(手)작업'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반면, 자동화 속도를 조절하는 기업들은 생산성을 높이며 순항하고 있다. 유럽의 가전 업체 일렉트로룩스가 대표적이다. 일렉트로룩스는 세탁기 등의 자동 생산 설비에 수백만달러를 투입했지만 직원 수는 2011년 5만3000명에서 지난해 5만5000명으로 오히려 늘렸다.

로봇을 통한 자동화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온 독일 본의 노동경제연구소(ILE) 볼프강 다우트 교수는 WSJ에 "적어도 유럽에서는 로봇 때문에 해고되는 노동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했다. 강력한 노조가 노동자들의 재교육을 요구하고 있다는 게 한 가지이고, 갈수록 복잡해지는 산업 체계에서 기계와 협업하는 것은 결국 '생각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