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선진국과 다수의 신흥시장국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해법의 하나로 이른바 J노믹스로 불리는 새롭고 혁신적인 경제 전략을 도입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최근 산업연구원(KIET)에 보내온 ‘J노믹스와 한국의 새로운 정책 어젠다’라는 제목의 기고문 내용이다. 그는 “선진국과 신흥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 문제는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성장의 혜택이 상위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라며 “이 문제를 풀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레이거노믹스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는 실패했다”는 평소 지론을 거듭 밝히면서 “21세기에는 새로운 사회 협약이 필요하다”고 했다. J노믹스가 그런 시도의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은 고학력 중산층과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경제기반 위에 고르게 번영을 공유하는 경제사회를 창출하기 위한 대안적 경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했다.

‘월간 KIET 산업경제’ 5월호에 게재되는 스티글리츠 기고문은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에 맞춘 기획으로 보인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권위에 기대 정부 정책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국책연구소의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있겠지만 정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다.

외국 학자가 한국 경제 현안을 파악하고 진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스티글리츠가 J노믹스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는 J노믹스의 핵심인 ‘소득 주도 성장’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지향점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가 소득 주도 성장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정부 정책이 성과를 내고 있다면 시비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난 1년의 경제성적표는 기대 이하다. 최근에는 “경기 침체국면의 초입 단계”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호조를 띄고 있는 것과 딴판이다. 한국 경제의 역주행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그래서 세계적인 석학까지 동원한 J노믹스 선전이 더 뜬금 없어 보인다.

올들어 2~4월에 전년 대비 취업자수 증가폭이 석달 연속 10만명대 초반에 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9월~2010년 2월 이후 처음이다. 수출·투자·산업생산·제조업 가동률·기업심리지수 등 주요 지표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삼성전자를 빼면 코스피 상장기업의 1분기 영업이익이 작년보다 6% 이상 줄었을 정도로 기업들이 고전하고 있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의 김광두 부의장은 페이스북에서 “요즘 ‘경제하려는 의지’가 기업인들에게 있는가? 키우려는 의지보다 나누려는 의지가 더 강한 분위기는 어떤가? 노사간의 균형은 어떤가? 설비투자와 수출에서 반도체를 빼면 어떤가?”라고 물으며 위기감을 나타냈다.

반면 정부는 한국 경제 흐름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경기동향 보고서에서 ‘전반적으로 회복 흐름이 이어지는 모습’이라는 표현을 뺏다가 3시간만에 다시 추가하기도 했다. “같은 통계 자료를 놓고 어떻게 저리도 생각이 다를 수 있는지 놀랍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정부는 특히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 상황이 악화됐다는 당연한 지적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감소는 없었다”고 단언했다.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도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근로시간 단축의 부작용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고, 설사 있어도 일시적”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정부 때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라는 말이 유행했다. 2013년 봄에 나온 맥킨지 한국경제 보고서가 계기다. 보고서는 “한국 경제가 구조적 위기·위험을 맞고 있는 데도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냄비속 개구리’에 비유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맥킨지의 지적에 공감했다. 심지어 작년 10월 KDI가 경제전문가 4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8%가 여전히 그 지적에 동의한다고 했다. 지난 정부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공공·노동·금융·교육의 4대 개혁을 추진했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정부가 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 정부는 현실 인식이 전혀 다르다. 한국 경제의 잘못된 흐름은 모두 과거 정부의 일로 치부한다.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정책으로 밀어붙이면서 ‘맥가이버 칼’이라고 쥐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고 있다. 현실에 맞춰 이론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이론에 맞춰 현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막고, 정책 오류 가능성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낙관, 터무니없는 자신감, 외골수 고집이 이 정부의 특징이다. 정치적으로는 나름 유용할지 모르지만 경제는 이런 접근이 통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경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스티글리츠의 ‘덕담’이 아닌 맥킨지의 경고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