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지금은 신규 환자 예방접종이 어렵습니다.”

14일 기자가 서울 강서구에 있는 한 비뇨의학과의원에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가다실(Gardasil) 9가’의 예방접종이 가능한지 여부를 문의하자 이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이 병원 관계자는 “현재 가다실 물량이 부족해 병원에서 1, 2차 예방접종을 맞았던 환자만 추가 접종할 수 있다”며 “예방접종을 받으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료기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울산 남구에 위치한 여성병원 의료진은 “당분간 가다실9가 신규 접종은 어렵다”며 “전국적으로 가다실 9가 물량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을 접종하는 모습.

인터넷 상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서는 "가다실 9가 예방접종을 하려고 병원 열군데 넘게 문의해본 듯하다”, “1차, 2차 접종을 맞았는데 물량이 없어 3차 접종 시기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게시글이 잇따랐다. 사실상 작년부터 우려가 제기된 ‘가다실 9가 물량 부족’이 현실화된 셈이다.

◇ ‘가다실 9가’ 접종 왜 어렵나

생식기 감염을 일으키는 HPV 백신은 여성의 자궁경부암뿐 아니라 외음부암, 질암, 항문암, 생식기 사마귀, 남성의 항문암, 생식기 사마귀 등을 예방한다. 국내에 판매되는 HPV 백신은 머크의 한국법인인 한국MSD의 가다실(Gardasil), 가다실 9가(Gardasil 9)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서바릭스(Cervarix) 등 3종류다.

의료계에 따르면 HPV의 대표적인 백신인 ‘가다실 9가’의 공급이 달리면서 현재 일선 의료기관들이 예방접종을 처음 맞으려는 신규 환자들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 머크의 ‘가다실’은 대표적인 HPV 백신으로, 가다실 9가는 2016년 국내에 처음 출시됐다. 국내에서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의 중요성과 효과가 강조되면서 가다실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가다실 9가 제품.

전세계적으로도 가다실 9가 수요가 늘어났지만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다. 머크는 작년 6월 사이버 공격을 받아 일부 생산시설이 악성코드에 감염돼 제품 생산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 MSD 관계자는 “전세계적으로 수요가 급증한 게 가장 큰 원인이고 그런 와중에 작년 랜섬웨어 공격으로 인해 물량 전량을 자체 폐기하게 되면서 가다실 9가 공급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이에따라 국내에서 가다실 9가 예방접종은 올해 가을부터나 원활하게 이뤄질 전망이다.

한국 MSD 관계자는 “올해 9~10월부터는 국내에 충분한 양의 물량이 들어올 예정”이라며 “올해 초 국내 병원과 의사들에게 상반기 물량이 빠듯할 것으로 예측돼 예방접종 및 신규 환자 접수 계획에 참고해달라고 공지한 바 있다”고 밝혔다.

◇ 국가 접종은 ‘2가·4가’만… 현장에선 ‘9가’ 기다려

이번 가다실 9가의 수요-공급 문제는 정부가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무료 지원하는 국가예방접종(NIP)과는 별개다. 즉 국가 예방접종사업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보건당국은 2016년부터 만12세 여성청소년 대상 자궁경부암 국가예방접종사업에 2가와 4가 백신인 '가다실'과 '서바릭스' 를 도입해 무료접종을 시행하고 있고, 가다실 9가는 지원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예방접종관리과 관계자는 “국가예방접종사업은 현재 2가, 4가 2개에 대해서만 지원하고 있으며 총량 구매해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다”면서 “가다실 9가는 민간 영역”이라고 말했다.

현재 보건 당국은‘가다실 9가’의 국가예방접종 전환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에서 가다실 9가 비용은 약 20~25만원선으로, 3회 접종을 해야 하므로 60~75만원이다.

복지부 예방접종관리과 관계자는 “가다실 9가를 국가 무료 예방접종지원 사업 대상으로 전환하거나 추가할 계획은 현재 없다”고 밝혔다. 그는 “HPV 백신 2가, 4가의 경우 예방효과와 접종 대상에 대한 충분한 분석 이후 도입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국내·외 시장에서는 기존 ‘2가·4가’보다 ‘9가’ 백신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최근 국내 의료현장에서 ‘가다실 9가’의 물량 확보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진이 HPV 백신을 한 남성에게 접종하고 있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가다실 9가가 쉽게 말해 다음 세대 버전으로 기존 백신보다 예방 가능한 범위가 더 넓다 보니 가다실 9가 쪽으로 거의 옮겨가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최근 한 대학 내부 커뮤니티에는 “가다실 4가보다는 9가가 나을 것 같아 일단 기다려야겠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가다실 2가, 4가, 9가 백신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 2017년 1월 가다실9가를 국가예방접종(NIP)으로 채택한 나라는 전세계 6개국에 불과했으나, 올해 2월 기준 총 18개국으로 1년 새 3배 늘었다. 호주, 체코 등은 올해부터 NIP 사업에 가다실9을 포함했다.

미국의 경우 NIP 뿐만 아니라 모든 HPV 예방접종을 ‘가다실9가’만으로 시행하고 있다. 9가 백신 출시 이후 기존 4가 백신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면서 사실상 미국 시장에서 퇴출된 셈이다. 중국도 최근 가다실 9가에 대한 판매를 조건부 승인했다. HPV백신 중 가다실 9가가 가장 많은 적응증을 보유하고 있고 예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머크에 따르면 가다실 2가·4가의 경우 각각 2가지, 4가지 바이러스 항체를 만들어주는 반면, 9가는 그보다 많은 HPV 6, 11, 16, 18, 31, 33, 45, 52, 58형 등 9가지 항체를 만들어줘 해당 바이러스를 예방할 수 있다. 가다실 9가의 예방율은 90%로, 기존 가다실 예방률(70%)보다 높다.

한편, 외신에 따르면 중국 시장이 본격 열리는 등 전세계적인 가다실 수요 증가로 머크의 올해 1분기 가다실·가다실 9가 전세계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24% 증가한 6억6000만달러(약 7047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당초 미국 월가(wall street)가 전망한 7300만달러(약 779억원)을 훌쩍 넘은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