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위 통신장비업체인 중국 ZTE(중싱통신)가 미·중 무역전쟁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됐다. ZTE는 9일(현지 시각) 홍콩거래소에 제출한 문건에서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의 제재 조치로 회사의 주요 영업 활동이 중단됐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16일 자국 기업들에 향후 7년간 ZTE와의 거래를 중단하라고 명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회사가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다.

ZTE는 스마트폰 사업부 매각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대표 제조업체 몰락시킨 미국

ZTE는 지난해 매출 18조3600억원, 영업이익 1조1400억원을 올린 중국 대표 IT(정보기술) 제조업체이다. 지난해 전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서 13%의 점유율로 중국 화웨이, 스웨덴 에릭슨, 핀란드 노키아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전 세계 9위 업체이다. 이런 우량 기업이 순식간에 문을 닫을 처지가 된 것은 미국 정부의 제재 때문이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ZTE가 이란·북한 제재 규정을 어긴 책임을 물어 고위 임원을 해고하고 직원들을 징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2025년까지 7년간 미국 기업과 ZTE의 거래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의 ZTE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달 미국 기업과의 거래가 금지된 ZTE는 주요 영업 활동을 중단하며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조치로 통신장비와 스마트폰 부품의 25~30%를 미국에서 수입하던 ZTE는 곧바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미국 퀄컴에서 공급받던 칩세트와 통신모뎀은 물론 통신용 광케이블과 각종 부품 수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뉴욕타임스는 "ZTE의 중국 선전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직원들은 강제 휴가를 떠나고 있다"면서 "중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업은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고 분석했다.

제품 재고가 소진된 ZTE는 9일 알리바바 등 인터넷 쇼핑몰과 오프라인 매장에서 스마트폰 판매를 중단했다. 또 ZTE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매각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일본 닛케이는 "ZTE가 화웨이·샤오미 등에 스마트폰 사업부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핵심 부품은 물론 미국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된 ZTE가 스마트폰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통신장비·스마트폰 시장 판도 요동

ZTE 제재에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속내가 숨겨져 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 초 고성능 의료장비, 산업용 로봇, 통신 장비 등 중국의 핵심 산업 육성 프로젝트인 '중국제조 2025'에 들어 있는 1300여 개 품목에 관세 부과 조치를 발표했다. 화웨이와 함께 글로벌 통신 장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ZTE에 강도 높은 제재를 내린 것도 중국의 기술 추격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ZTE의 위기는 전 세계 통신 장비 시장과 스마트폰 시장에 상당한 파장을 낳을 전망이다. ZTE는 미국에서 이동통신사와 제휴하지 않고 자체 유통으로만 9%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ZTE가 스마트폰 사업을 접을 경우 삼성전자, 애플, LG전자 등이 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전망이다. 상용화를 앞두고 있는 5G(5세대) 통신 시장도 요동칠 수 있다. ZTE는 퀄컴, 인텔 등과 제휴하면서 5G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야심을 나타내왔지만 이 역시 무산될 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