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경북 포항시 철강산업단지에 있는 중견 철강회사 넥스틸 제1 공장. 2014년만 해도 24시간 가동되며 연간 56만t의 강관을 만들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3개 라인 중 하나는 생산을 아예 멈췄다. 나머지 2개 라인도 생산 물량 조절을 위해 잔업과 특근을 없앤 상태였다. 2014년 말 500명이 넘던 전체 직원은 200명 초반까지 줄었다. 김이용 넥스틸 생산본부장은 "올해 500억원 정도 들여 공장을 미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해 영업이익(200억원)의 2.5배에 달하는 돈을 들여 공장을 이전하는 건 미국의 통상 압력 탓이다.

미국발 통상 압력에 견디다 못한 중견 철강 업체들이 국내 생산을 포기하고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그동안 각종 규제와 노사 문제 등으로 해외로 공장을 옮겨온 우리 기업들에 통상 장벽까지 더해지며 '코리아 엑소더스(탈한국)'도 가속화하고 있다.

◇중견 철강 업체, 통상 압박에 존폐 기로

넥스틸은 포스코로부터 열연 강판을 공급받아 이를 강관으로 가공하는 업체다. 원유나 셰일가스 시추에 쓰이는 유정용 강관(OCTG)이 주력 제품이다. 유정용 강관은 국내엔 수요가 거의 없어 대부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왔다. 박효정 넥스틸 대표는 "중소기업이 죽을 힘을 다해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만들어 놓았지만 미국 통상 압박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량 대부분을 미국으로 수출했는데 '쿼터(수출 물량) 제한'에 '관세 폭탄'까지 때리니 사업을 접으라는 얘기"라고 했다.

멈춰선 공장 - 3일 오전 포항시 철강산업단지에 위치한 넥스틸 1공장 내부. 2010년 200억원을 투자해 설치한 생산 라인이 멈췄다. 유정용 강관을 만들던 라인인데 미국의 통상 압력으로 수출이 막혔기 때문이다. 김이용(사진 오른쪽 둘째) 생산본부장은 “올해 생산 라인 2개를 미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최근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 미국의 25% 철강 추가 관세 조치를 면제받는 대신 2015~2017년 평균 수출량의 70%에 해당하는 쿼터를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넥스틸의 강관 수출은 반 토막이 나게 된다. 여기에 미국 상무부는 넥스틸이 반덤핑 조사 과정에 자료 제출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75.81%의 반덤핑 관세까지 부과했다.

◇울며 겨자 먹기식 공장 이전

강관 회사인 세아제강은 2016년 미국 휴스턴 지역에 현지 생산 체제를 갖췄다. 유정용 강관 생산 설비와 후처리 설비를 인수해 연산 15만t의 세아스틸 USA 생산법인을 세웠고, 지난해 6월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튜빙(유정용 강관을 생산하기 위한 이전 단계 제품) 공장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업계 관계자는 "세아제강의 대미 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약 70%에 달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통상 압박은 회사 존폐와 직결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아제강은 미국 공장 인수로 국내 인력 감축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2016년 863명이었던 직원은 작년 말 733명으로 130명(15%) 줄었다.

대형 철강사들도 중국·인도 등 신흥 철강 강국의 맹추격에 미국 통상 압력까지 더해지면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세계 1위였던 포스코는 5위로 떨어졌고, 국내 2위 현대제철은 영업이익이 2014년을 정점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15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업계 5위 동부제철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한때 한국 산업계의 자랑이었던 철강이 살기 위해선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과 산업 전반의 체질을 강화하는 근본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통상 압력에 탈(脫)한국 가속화

변압기 생산 회사인 현대일렉트릭은 지난달 15일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인수하고, 350억원을 추가로 투자하기로 했다. 2011년부터 매년 반복되어온 변압기에 대한 반덤핑 관세가 올해 60.81%까지 높아지자 내놓은 조치다. 지난 1월 미 정부가 한국산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자 국내 가전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LG는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2019년 1분기까지 완공 계획이던 공장을 올 연말까지로 앞당기고, 삼성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카운티에 새로 지은 가전 공장 조기 가동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