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에 원가 정보나 생산현황을 공개하라는 외부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최근 대법원이 이동통신사 3사에 통신비 원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한 데 이어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005930)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업기밀을 보호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경쟁자에게 노하우를 알려주라는 것과 똑같다"며 "정보 공개 움직임이 산업계 전반에 퍼질까 봐 우려된다"고 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직원들이 웨이버 검사를 하고 있다.

고용노용부는 최근 "산업재해 입증에 필요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해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겠다"며 작업환경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이달 19일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 고용부는 산업재해 당사자 외 제3자의 요청에도 보고서 공개를 허용했다.

고용부 결정에 대해 삼성전자는 "해당 자료에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 설비배치, 근로자 수, 유해물질 목록, 사용하는 주요 화학제품 이름 등 산업 기밀이 담겨 있어 제3자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며 보고서 내용이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하는지 가려달라고 산업통상자원부에 요청했다.

산업부는 17일 오후 산업기술보호위원회 반도체전문위원회 2차 회의를 열고 삼성전자의 기흥·화성·평택·온양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가 '국가핵심기술'로 보호받아야 하는 항목들인지에 대해 심리할 예정이다. 16일 1차 회의가 열렸지만, 위원회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산업부의 판단이 보고서 공개를 막을 구속력은 없지만, 행정·사법 절차에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보고서 공개를 막기 위해 수원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으며 국가권익위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행심위)에도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행심위는 이날 오후 집행 정지 신청에 대해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재계가 삼성전자의 보고서 공개 여부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유는 이 사례가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SDI(006400)도 고용부의 작업 환경 보고서 공개를 막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삼성디스플레이는 행정심판과 함께 지난 13일 산업부에 국가핵심기술 판단을 요청했으며 삼성SDI도 대응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통신과 반도체 외에도 점점 기업을 상대로 한 정보 공개 요구가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기업에는 새로운 불확실 요소"라며 "특히 반도체 외에 산업재해가 상대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화학, 정유업계도 정보공개 최종 결정을 앞두고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앞으로 시민단체들은 더 많은 기업에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할 것"이라며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좀 더 신중하게 판단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정보공개가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까 우려하고 있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혁신성장실장은 "기업의 기밀 사항은 사소한 것이라도 경쟁력 요인"이라며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 비밀 보호 원칙은 좀 더 철저하고 신중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한국·중국 간 기술 격차는 초고직접 반도체가 2~3년이고, 대부분은 1~2년으로 단축된 상황이어서 관련 정보가 유출되면 국가적으로 막대한 손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기업 정보 공개의 원칙과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본부장은 "기업들의 영업기밀을 보호하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과정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총은 "보고서 내용 중 유해인자 노출 수준 정보는 근로자 질병과 업무 연관성을 규명하는데 필요한 자료지만 생산시설 구조, 장비 배치, 화학제품명과 같은 정보는 산재 입증과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민감한 정보여서 공개 대상에서 제외하는 정책적 균형감이 필요하다"며 "제공받은 안전보건자료를 산재 입증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외부 유출 시 처벌규정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