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 여건 개선” vs “준비 안 돼 제도 보완 필요”

정부가 추진 중인 건설산업 일자리 개선 대책이 오히려 건설업계 우려와 부작용을 키우고 있다.

실제 현장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 당분간 대형 건설사가 부담을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건설업계는 “근로 여건을 개선하자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바뀐 제도 탓에 기존 계약까지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건설현장.

9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추진하는 건설현장 근로와 관련된 정책은 ‘적정 임금제’와 ‘발주자 임금 직접 지급제’, ‘주52 시간 근무제’ 등이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적정 임금제다. 적정 임금제는 근로자에게 주는 노임을 발주자가 정한 금액 이상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제도다. 공사가 하도급으로 넘어가는 다단계 도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설 근로자의 임금 삭감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

정부 계획대로면 오는 6월부터 적정 임금제 시범사업 10개가 차례로 나온다. 10개 공사의 사업 예산은 1조2000억원. 이중 건설 근로자 임금은 3400억원으로 적지 않다. 정부는 시범사업 결과를 평가해 실제 제도에 반영할 계획이다.

정부가 진행하는 시범사업은 노무비 경쟁방식과 노무비 비경쟁방식 두 가지다. 노무비 경쟁방식을 선택하면 노무 단가를 깎지 못하는 대신 노무량은 줄일 수 있다. 건설회사로서는 공사비를 줄일 방법이 있는 셈이지만, 노동강도는 세질 수 있다. 노무비 비경쟁방식은 입찰할 때 노무비를 아예 빼고 가격을 산정해 입찰하는 방식이다. 노무비는 100% 발주자가 정한 대로 반영해야 한다. 근로자 처우가 개선되지만, 공사비가 증가할 우려가 있다.

건설업계는 한국이 아직 적정 임금제를 도입할 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부는 이미 미국도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며 도입을 서두르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의 입찰 제도가 다른 만큼 쉽게 비교하기 어렵다고 건설업계는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 공공공사 입찰에 참여하는 건설사는 기준 가격 없이 원하는 공사비를 써내지만, 한국의 공공공사에서는 발주 때부터 상한선 역할을 하는 예정가격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보통 예정가격의 80% 안팎에서 낙찰가가 결정되는 만큼 공사비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구조라고 건설업계는 설명한다. 적정 임금제를 시행하려면 공사비가 기존보다 늘게 되는데 입찰가를 올리기 어렵다는 의미다.

건설업계는 또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숙련도에 따라 임금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우려한다. 예를 들어 숙련도가 낮은 사람이 8만원, 높은 사람이 14만원을 받는 작업의 경우 임금은 평균인 12만원으로 결정된다. 이 경우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게 되지만 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줄여서 주기 어렵다.

정부는 2020년부터 300억원 이상 공공공사에 이 제도를 의무화하고, 2021년부터는 100억원 이상 공사로 확대할 방침이다. 적정 임금제 추진을 위한 건설근로자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지금은 공공공사를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하고 있지만 노조의 힘이 강한 현실을 볼 때 민간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보완책이 제대로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건설현장을 뒤바꿀 또 하나의 노동 정책은 ‘주52 시간 근무’다. 24시간 융통성 있게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제조업과 달리 건설 현장은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고 다른 공정의 영향도 크게 받는다. 가장 걱정이 큰 대목은 공사 기간을 맞출 수 있느냐다.

현재 건설근로자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61시간, 해외 근로자의 경우 67시간이다. 기상 환경은 물론 외부 변수 등으로 작업이 지연됐을 경우 주말 근무 등을 통해 부족한 작업을 보강해야 하지만, 52시간 근무를 적용할 경우 공사를 제때 마무리하지 못하는 사업장이 속출할 수 있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52시간 근무 제한으로 늘어날 인건비보다 무서운 것은 지체 배상금”이라면서 “공사를 제때 마치지 못하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또 주52 시간 근무를 반기지 않는 근로자도 상당수다. 초과 근무를 통해 수입을 늘리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외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의 경우 60~70시간을 일하는 현지 근로자를 감독하기도 어려워진다.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등은 최근 주52 시간 근무 제도를 현장에 적용할 방안을 찾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또 다른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300인 이상 사업장에 해당하는 종합건설사 109곳은 7월 1일부터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데 이미 계약된 공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현장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발주자 임금 직접 지급제도 부담이라고 건설업계는 호소한다. 이는 하도급 업체의 임금 체불을 막기 위해 원도급자가 하도급 근로자에게 임금을 직접 주는 제도다. 원도급사들이 하도급 업체 임금 지급까지 떠안는 것이라 관리 비용이 증가한다.

건설업계는 근로기준법에 ‘건설근로자 임금 체불에 대한 원하수급인의 연대 책임’이 규정돼 있어, 이미 임금을 보장할 규정이 있는 만큼 기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체불 이력이 없는 정상 업체가 훨씬 많은데 이들의 임금 지급까지 간섭하는 것은 건설업자의 영업권과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99.7%의 업체가 체불 문제가 없는 상태다. 0.3% 업체의 체불을 막기 위한 제도라는 것이다.

건설협회 관계자는 “만약 공공공사에 발주자 임금 지급제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시범사업을 통해 문제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거치고, 제도 시행도 대형 공사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