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재계 1위 삼성을 공격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이번엔 재계 2위 현대자동차그룹을 겨냥했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엘리엇매니지먼트는 4일 공식 자료를 내고 "현대차·현대모비스·기아차 주식 10억달러(약 1조500억원)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어 "최근 현대차그룹이 밝힌 지배 구조 개편안은 고무적이지만 회사와 주주를 포함한 이해 관계인들을 위한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며 현대차의 지배 구조를 문제 삼았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밝히지는 않았다. 현대차의 대응에 따라 강도를 높여 추가 행동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문재인 정부 들어 대기업에 대한 지배 구조 개선 압박이 높아지고, 소수 주주 권익 보호라는 명목으로 대주주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각종 법안 개정이 추진되는 틈을 이용해 엘리엇뿐만 아니라 단기(短期) 차익을 노리는 글로벌 헤지펀드의 한국 기업 공격이 본격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28일 순환 출자 구조를 해소하기 위한 지배 구조 개편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기업 가치와 투자자 이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며 국내외 주주들과 충실히 소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헤지펀드인 소버린은 2003년 SK㈜ 지분 14.99%를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됐다. 이후 사외이사 추천, 자산 매각, 주주 배당 등을 요구했다. 소버린은 경영권 장악엔 실패했으나 2년 만에 9000억원 돈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컨은 2006년 헤지펀드 스틸파트너스와 함께 KT&G 지분을 매입했다. KT&G에 온갖 공세를 가하던 칼 아이컨은 1년 만에 1500억원을 챙겨 떠났다.

2015년 삼성을 타깃으로 했던 헤지펀드 엘리엇이 이번엔 현대차를 노렸다. 헤지펀드의 우리 기업 공격이 일상화됐다. 엘리엇은 일단 현대차에 "경영진이 계열사별 기업 경영 구조 개선, 주주 환원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 대해 세부적인 로드맵을 공유해달라"고 요구했다.

◇현대차 어떻게 되나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3사의 시가총액(4일 기준)은 73조4154억원. 엘리엇이 가진 1조500억원어치는 1.4%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현대차그룹은 현재 지분만으로 엘리엇의 영향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 현대모비스는 현대차 계열이 31.1%(의결권 기준), 국민연금이 10.1%를 갖고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엘리엇이 4%대에서 시작해 7%까지 늘렸던 삼성물산 경우와 이번은 다르다"며 "공정위도 현대차 지배 구조 개편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만큼 국민연금도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에 찬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분할·합병에 반대하며 우호 세력 결집에 나서고 동조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현대모비스의 외국인 지분은 49%에 달한다. 재계 관계자는 "엘리엇은 '한국 기업은 흔들면 흔들수록 그만큼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을 통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엇이 의도대로 '현대차 흔들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블룸버그는 "한국 재벌의 복잡한 지분 구조를 감안할 때 엘리엇이 강력한 압력을 통해 요구를 관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로이터는 "(삼성 공격 때와 달리) 다른 투자자로부터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삼성 뒤흔든 엘리엇, 삼성전자 49조원 자사주 소각도 이끌어

엘리엇은 미국의 억만장자 폴 싱어 회장이 1977년 설립한 헤지펀드다. 주로 채무 위기에 직면한 나라의 국채나 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고수익을 내는 전략을 써 '벌처(vulture·대머리독수리) 투자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350억달러(약 37조원)를 운영하며 최근 5년간 12개 나라에서 50개 이상 기업의 지분을 사들였다.

엘리엇이 국내에 이름이 알려진 건 2015년 6월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7.12%)을 갖고 있다고 공개하며 삼성이 추진하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가로막고 나섰다. 삼성물산 직원이 개인 주주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임장을 받았고, 삼성물산 지분 10%를 가진 국민연금 등의 도움으로 표 대결에서 엘리엇 공세를 막았다. 엘리엇은 2016년에도 삼성전자 지분 0.6%를 확보한 뒤 지주회사 전환과 나스닥 상장, 30조원 특별 배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삼성전자는 엘리엇 요구를 모두 거부하면서도 자사주 49조3000억원어치를 소각했다. 재계에서는 연구·개발과 시설 투자에 써야 할 자금이 엘리엇의 요구로 주주 가치를 높이는 데 쓰였다고 평가했다.

◇삼성·현대차 다음 타깃은… "헤지펀드 공격에 무방비 노출"

재계는 엘리엇의 등장을 헤지펀드의 한국 기업 공략의 신호탄으로 해석한다. 현 정부가 기업 지배 구조 개선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주주 권리 보호를 위해 대주주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각종 법안과 정책이 추진되는 틈을 타 헤지펀드 공격이 한층 거세질 것으로 우려한다. 익명을 요구한 10대 그룹 임원은 "엘리엇이 삼성을 공격해 상당히 재미를 봤고, 최근 정부나 법원의 기류를 보면 (대기업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이 국내 기업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어서 외국계 자본의 놀이터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삼성이나 현대차도 쉽게 당하는데 '다른 대기업은 오죽할까'라며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은 소수 주주의 권리 보호와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해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을 담은 상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10대 기업 중 4곳,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6곳이 외국계 헤지펀드 공격에 취약한 것으로 분석됐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한국 대기업은 경영권 방어는 물론 순환 출자 해소, 금융·산업자본 분리 같은 지배 구조 문제 해결에 과도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며 "미국·일본·영국 등 선진국도 도입한 '차등(差等) 의결권'이나 '포이즌 필'(poison pill·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할 때 기존 주주들이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신주를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제도) 같은 기업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