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의 부인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 고위 관료들이 "한·미 FTA 협상과 환율 논의는 연결돼 있다"는 발언을 연일 내놓고 있다. 30일(한국 시각)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은 CNN방송에서 "우리는 환율 평가절하와 관련된 것을 (한·미 FTA의) 하위 합의(sub-agreement)에 넣었다"고 했다. 전날 우리 기획재정부와 통상교섭본부가 "미국과 환율 협상은 FTA와 별개"라고 거듭 부인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국과 무역 전쟁을 앞둔 미국이 무역협정과 환율을 연결시키는 '시범 케이스'로 한국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역협정과 환율은 한 묶음" 계속 주장하는 미국

지난 26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국무회의에서 "빛 좋은 개살구만 주고 왔다"며 한·미 FTA 협상 결과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한국 주요 언론에 보도된 27일부터 통상 전문가들과 기업 쪽에서 "미국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이 한국이 발표한 협상 결과를 전했지만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다. 보통 무역협상이 마무리되면 양측이 동시에 결과를 공개하거나 한쪽이 공개하고 상대방 정부가 즉시 이를 확인해준다. 정부 내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김 본부장이 협상 결과를 미리 공개해 사실상 확정시키는 '대못 박기' 전략을 폈다가 역공(逆攻)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28일 새벽 백악관 고위 관계자가 "한·미 양국이 환율 개입의 투명성을 높이고,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한·미 FTA 부속 합의(side letter)를 했다"고 말한 사실을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그날 오후 기획재정부는 보도 해명 자료를 내고 "환율 협의는 FTA와 별개"라고 반박했다.

29일 새벽 미국 백악관과 USTR은 환율 합의를 포함시킨 통상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전날 기재부가 미국 재무부를 통해 항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환율 협상을 FTA와 연계하자는 미국 측 제의가 있었지만 단호히 거부했다"며 "환율과 FTA는 전혀 별개라는 게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다시 반박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연구원 관계자는 "미국이 최종 합의 발표 전에 자신들이 원하는 환율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대못 박기' 전략을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발표는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등 주요 언론이 보도해 시장에 전해졌고, 우리 원화값은 일주일간 달러당 15원 넘게 치솟았다(원·달러 환율 하락). 환율 협의가 어떤 형태로든 문서화돼 무역협정에 부속되면 외환시장에 쏠림현상이 과도할 때 지금처럼 자유롭게 외환시장에 개입하기가 어려워진다. 환율 협의는 무역협정 조항이 아니어서 이를 어겼다고 제재를 받지는 않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정보를 일반에 공개하게 되면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은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을 경우 환율이 적정 환율 아래인 달러당 900원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며 "수출 산업 전체가 초토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무역 전쟁, 국내 정치 의식한 듯

미국이 우리 정부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환율 문제를 무역협정과 연결시키려는 의도에 대해 통상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댄다. 첫째는 미국 국내 정치용 보여주기식 발언이라는 얘기다.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 성과를 자랑하려고 한·미 간 협상 결과를 부풀려 발표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시각은 정부도 공감하고 있다.

둘째는 미국이 한국과의 무역협상을 이후 무역 분쟁 협상 과정에서 일종의 '표준'으로 쓰기 위해 환율에 공을 들인다는 분석이다. 정인교 인하대 부총장은 "미국은 2015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당시에도 부속서에 환율 합의를 넣으려 했고, 이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에서도 이를 추진했었다"며 "한·미 FTA에 환율 조항을 삽입하면 이후 중국 등 다른 나라에 환율 합의를 요구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이 한국과 FTA 협정문에 환율 문구를 넣는다면 외국과의 무역협정에서 첫 사례가 된다고 뉴욕타임스와 로이터가 보도했는데, 이는 미국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언급이라는 게 우리 통상 전문가들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