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에 있는 한 금융 관련 스타트업(초기 창업기업) 사무실. 19.8㎡(약 6평) 남짓한 공간에 7명의 직원이 프로그래밍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편에 있는 소파에는 한 직원이 안대를 쓴 채 쪽잠을 자고 있었다. 문 옆에도 간이용 침대가 있었고, 책상 밑에는 즉석 컵밥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이곳 직원들은 모두 매일 새벽까지 강행군을 하고 있다. 한 직원은 "스톡옵션과 임금 등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는다"면서 "우리에게는 정시 출퇴근보다 성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오모(30) 대표에게 "근로 시간 단축이 스타트업에도 해당되는 걸 아느냐"고 묻자, "정말이냐. 하루 20시간씩 일해도 성공할까 말까인데 대기업처럼 하루 8시간씩 근무해서 어떤 스타트업이 살아남겠느냐"고 했다. 오 대표는 "자발적으로 치열하게 일해 성공하려는 것을 일률적으로 규제하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해가 진 후에도 사무실 불이 환하게 켜진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전경. 이곳에는 IT, 게임, 바이오 등 1300여개 벤처기업이 입주해 있다.

국내 10만여개 스타트업은 3년 뒤 근로 시간 규정이 송두리째 바뀌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대부분 종업원 수가 50인 미만인 스타트업들은 2021년 7월부터 근로 시간 단축(주당 52시간) 규제의 적용을 받는다. 스타트업의 직원도 예외가 아니다.

◇스타트업계 "근로시간 단축 적용 몰라"

본지가 18·19일 이틀간 전국 스타트업 132곳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근로 시간 단축 제도를 세부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응답은 8.3%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략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40.9%)거나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용은 잘 모른다'(40.2%), '관심이 없어 잘 모르겠다'(10.6%)였다. 현재 근로 시간 도입 준비에 대해서도 '다른 사업을 우선하느라 현재 준비하고 있지 않다'(34.8%)와 '직원들이 자발·자율적으로 근무하고 있어 우리와는 상관없다'(41.7%)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근로시간 단축을 대기업이나 중소 제조업체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무 시간 단축이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서울에 있는 자전거공유 스타트업 김모 이사는 "스타트업은 근로 시간을 칼로 두부 자르듯 할 수 없다"면서 "3년 뒤 스타트업에 근로 시간 단축이 적용되는 순간 창업자들은 범죄자가 되든가 아예 창업을 포기하든가 양자택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격탄 맞는 게임·바이오벤처들

당장 게임이나 바이오 분야의 벤처기업들이 근로 시간 단축으로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간암 치료제인 '펙사벡'을 개발하고 있는 바이오벤처 신라젠이다. 이 회사는 창사 이래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지만 현재 시가총액이 8조원에 이른다. 펙사벡이 글로벌 임상시험에서 항암치료 효과가 나타나면서 주가가 폭등한 것이다. 전 직원이 몇 년간 밤을 새워가며 한 가지 신약 후보물질에만 매달린 성과물이다. 고생한 신라젠 임직원 43명이 받은 스톡옵션은 2520억원 정도다. 1인당 50억원 이상의 보상을 받은 것이다. 이 회사의 관계자는 "전 세계 제약·바이오 업체들과 경쟁하는 항암제 개발에서 우리가 근로 시간을 지키느라 출시 일정을 늦춘다고 하면 투자자들이 이해하겠느냐"고 말했다.

작년에 사상 최대인 4조원대 수출을 기록한 게임업계도 근로 시간 단축으로 글로벌 진군이 꺾일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게임업체 넷마블은 직원들을 혹사시킨다는 거센 비판을 받은 뒤 작년 2월부터 야근과 휴일 근무를 일절 못하게 하고 있다. 근무 환경은 개선된 반면, 해마다 2배 가까이 성장해온 넷마블의 쾌속 질주에는 불안감이 드리워지고 있다. 넷마블은 작년에 신작 게임 17개를 내놓을 계획이었지만 실제로는 8개 출시에 그쳤다. 올해는 아직 신작이 1편도 없다. 넥슨도 올해 예정 신작 수가 12개로 작년(15개)보다 주는 추세다.

중소 게임업체의 한 대표는 "자금력이 취약한 소규모 게임 개발사는 인력을 추가 채용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존폐의 기로에 빠질 것"이라며 "국내 중소 업체가 하던 개발 업무 중 상당 부분이 중국 개발업체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