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상장사 T사는 지난달 말 전 직원의 절반을 공시팀으로 파견 보냈다. 3월 말 주주총회를 앞두고 소액주주 의결권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다. T사 관계자는 “최대주주 지분율이 10% 남짓이고 기관투자자도 많지 않아 의결정족수를 확보할 수 있을지 염려돼 직원들을 동원해 주주들의 주총 참석과 의결권 위탁을 독려하고 있다”면서 “섀도보팅 폐지로 무조건 의결정족수 25%를 모아야 해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비슷한 상황의 바이오 기업 B사는 크게 우려하지 않는 상황이다. B사 또한 최대주주 지분율이 10% 정도에 그치지만, 열성적인 소액주주가 많기 때문이다. B사 관계자는 “10년 이상 매해 주주총회에 오는 개인 투자자도 있다”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의결정족수 미달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B사의 소액주주 김모씨(58)도 “주총이 끝나면 주주들끼리 모여 ‘2차’를 갈 정도로 화기애애하다”면서 “일년에 한번 있는 파티인데 안갈 리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주주들의 집단행동으로 모든 기업이 ‘속앓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액주주들이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하고, 경영진이 화답하는 기업은 서로 상생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소액주주들이 경영 견제장치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다. 이상적인 ‘주주 자본주의’의 모델이 구현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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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선임 등 굵직한 안건 주도…“부작용 있더라도 소액주주 경영참여는 긍정적”

지난해 3월 24일, 나일론 원료업체 카프로(006380)는 소액주주들의 지원 속에 박승언 대표이사 재선임안이 통과됐다. 카프로 1, 2대 주주인 효성과 코오롱이 대표이사 교체를 추진했지만 소액주주들이 “지난해 주가 상승의 공로를 보면 연임하는 것이 맞다”고 현 경영진에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효성(11.65%)과 코오롱(9.56%)은 20%가 넘는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표이사 교체를 성사시킬 수 없었다.

소액주주들의 판단은 일단은 맞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주총 때만 해도 8000원대였던 카프로 주가는 7월 말 5000원대로 떨어지긴 했지만 이후 반등해 1만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다만 박승언 대표는 지난 1월 9일 일신상의 사유를 이유로 대표이사에서 사임했다.

지난해 9월과 올해 2월 각각 유가증권시장으로 이전한 카카오(035720), 셀트리온(068270)또한 주주제안으로 이전 상장이 결정된 사례다. 두 회사의 소액주주는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벤치마크 지수인 코스피200에 들어가려면 유가증권시장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회사 측을 설득해 임시주주총회를 열었다.

소액주주들의 잇따른 움직임은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코스닥 주요 종목까지 포함된 새로운 대표 벤치마크지수 KRX300을 만들게 했다. 소액주주들이 “코스닥시장에 있으면 기관 투자자 유치 측면에서 불리하다”고 잇따라 목소리를 낸 결과다. 금융당국이 코스닥 종목이 포함된 대표지수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한국거래소 한 관계자는 “열성 주주들의 집단 행동은 폐해를 낳기도 하지만, 이번 KRX300지수 개발 같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면서 “소액주주들이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하는 것을 기본적으로는 긍정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소액주주들이 경영진의 비리를 들춰낸 사례도 있다. 대한방직(001070)소액주주들은 설범 회장이 2005년 토지 및 건물 매각 과정에서 리베이트로 챙긴 15억원을 2009년 유죄 판결 뒤에도 회사에 반납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경찰에 고소했다. 설 회장은 이건으로 또 한번 법정에 서야 했다. 대한방직 소액주주들은 기세를 모아 지난해 말 감사 선임에까지 성공했다.
◇ 활성화되는 주주 카페…주주제안 채택 사례도 점차 늘어나

한국거래소와 대신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주총 시즌에 7건의 주주제안이 통과됐다. 2016년 주총 시즌에 한건도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대부분 배당 확대 정도에 그쳤지만 그래도 소액주주 목소리가 반영됐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네이버 소액주주 모임, 주주동호회 등을 검색하면 상당수 카페가 뜬다.

주주제안이 점차 활성화되는 데에는 주주들의 집단행동이 있다. 주주제안을 하려면 상법상 발행주식 총수의 3% 이상(의결권 위임 포함)을 보유해야 한다. 6개월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제한 사항도 있다. 이런 문턱이 있다 보니 개인투자자들이 나서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소액주주 카페가 활성화되면서 예년에 비하면 그나마 주주제안이 수월해졌다는 평가다.

2011년부터 약 3년여간 한 코스닥기업의 소액주주연대를 주도했던 개인투자자 양민성씨는 “과거에는 상장폐지가 확정되거나 대표이사 횡령이 발생하는 등 큰 사건이 있어야만 개인투자자 카페가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대다수 상장사의 투자자 카페가 있고 카페에 가입하지 않은 투자자도 네이버 종목 페이지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소액주주들이 뭉치기에 유리한 상황”이라고 했다.

한편 올해 주총 시즌에 주주제안 건수는 총 28건인 것으로 집계됐다. 농심홀딩스(072710)소액주주들은 회사 측에 10대 1 액면분할을 주주제안으로 요구했다. 한국타이어 자회사인 아트락스BX는 감사 선임을 놓고 회사 측과 소액주주 측이 표대결을 벌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