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 짱봄현에 있는 한국 섬유 기업 K사 공장. 한때 최대 3000명이 일했던 공장에선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공안(경찰)과 경비원 7명만이 정·후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국기 게양대의 태극기와 한글 안내판이 이 공장이 한국 기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지 직원들에 따르면 지난달 8일 K사 한국인 직원 12명이 하룻밤 새 사라졌다. 2000명에 가까운 베트남 근로자의 1월 임금과 사회보험료 312억동(약 14억6000만원)은 체불됐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4000곳을 넘어선 가운데, 경영 상황이 나빠지자 베트남에서 야반도주하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임금 체불은 물론 공장 설비까지 내팽개치고 출국해 연락을 끊는 것이다. 현지 업계에 따르면 K사에 이어 지난달 9일 호찌민시에 있는 한국 봉제 기업 B사도 문을 닫았다. 베트남 근로자 350여 명이 임금 29억동(약 1억4000만원)을 못 받았다. 지난 1월에는 호찌민시의 한국 봉제 기업 N사가 베트남 근로자 600여 명의 임금과 사회보험료 306억동(약 14억4000만원)을 체불하고 도주했다.

갑자기 잠적한 한국 기업들

동나이성 K사 공장 인근에서 만난 이 공장 총무팀 직원 도한티(43)씨는 "지난달 8일 한국인 직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조업은 중단됐고 근로자들은 공장 정문 앞에 주저앉았다. 티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시골 출신 여공들이 대부분인데 모두 공장 앞에서 사흘을 울었다"고 말했다. K사는 미국 의류 제품을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하는 한국 본사에서 일감을 받아 옷을 생산해왔다. 한국 본사는 최근 유동성 악화로 부도 위기에 내몰리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공장의 한국인 직원들을 전격적으로 철수시켰다.

지난달 9일 베트남 남부 짱봄현에 있는 한국 섬유기업 K사 공장 앞에 현지 근로자들이 모여 있다. 전날 K사의 한국인 경영진은 본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근로자들에게 임금과 설 상여금, 사회보험료를 주지 않은 채 잠적했다. 베트남 정부는 공장에 공안(경찰)을 배치하고 공장을 폐쇄했다.

베트남 최대 명절인 설을 앞두고 잇따라 벌어진 한국 기업의 야반도주는 베트남 사회에서 큰 분노를 샀다. 베트남 언론들은 임금을 떼인 노동자들의 사연을 앞다퉈 보도했다. 일반인들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이런 기업에 레드카펫을 깔아주고 인센티브를 줬단 말이냐"고 비판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까지 나서 근로자 지원을 지시했다. 동나이성 정부와 베트남 노총은 1월 월급의 절반과 상여금 일부를 대신 지급했다. 인근의 베트남 섬유 기업 10여 곳은 K사 근로자들을 우선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의 도망으로 생긴 피해를 베트남 사회 전체가 떠안고 있는 것이다.

동나이성 정부는 법인장이 돌아와 공장 자산을 매각해 밀린 급여를 지급하도록 한국 정부가 도와달라고 호찌민 한국 총영사관에 요청했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그러나 "법인장이 중범죄로 기소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나서 신병을 확보해 베트남에 넘겨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현지에서 신뢰 훼손 우려

야반도주는 인건비 상승과 경기 변동에 취약한 영세 섬유산업계에서 주로 벌어지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2016년 말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섬유 기업은 763곳에 이르지만 기업당 평균 투자액은 28억원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당국이 최근 7년간(2012~2018년) 최저임금을 연평균 18%씩 올리면서 인건비 압박이 생긴 것이다. 임충현 대한상공회의소 베트남사무소장은 "중국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베트남으로 옮겨온 업체들이 베트남 인건비마저 오르자 다시 내몰리고 있다"며 "일부 업체는 인건비가 더 낮은 나라로 떠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고 있다. 한국이 베트남에 직접투자를 가장 많이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기준 한국의 베트남 누적 투자 규모는 575억달러(약 61조4900억원)에 이른다. 최흥연 베트남중남부한인상공인연합회 부회장은 "일부 기업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한국 기업 전체의 신뢰가 깎이면 남은 기업들이 애꿎게 피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