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 인터뷰
"경기 이끌 주력 산업 안 보여…기업 활동 의욕 북돋아야"

“앞으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4년은 (그동안 유지했던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수습하는 일이 남았다. 다소 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금리 정상화 과정에서 충격 없이 매끄럽게 통화정책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태(73) 전 한은 총재는 “경제 구조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정책금리 수준이 세계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위기를 지났으니 그동안 낮췄던 금리를 정상화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총재는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이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제로(0)’ 금리를 운영하면서 한은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이런 형편을 생각하면 지난 4년 동안 이 총재가 안정적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했다”고 평가했다. 이 전 총재는 한은 총재로 재직했을 당시인 2007년 이주열 총재를 통화신용담당 부총재보에 이어 2009년에는 부총재로 발탁했다.

이 전 총재는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경제 상황이 좋으니까 우리 경제도 형편이 나아진 것은 맞지만 앞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고 나갈 새로운 주력 산업이 잘 보이지 않아 경제가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15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가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숙제라는 입장도 내놓았다.

그는 “우리 경제가 선진국으로 가까이 가면서 성장 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경제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할 수 있는 의욕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한은은 물가와 자산가격, 경기 상황, 국제 자금 흐름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한은이 가진 수단을 활용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상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 전 총재는 1968년 한은에 입행한 뒤 기획부 국장, 조사국 국장, 조사담당 부총재보, 부총재를 거쳤고 2006년 부산상고 2년 후배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한은 총재에 취임했다. 2010년 3월 퇴임할 때까지 44년간 한은을 지켰다. 한은 총재 재직 당시 물가 안정을 강조해 ‘인플레이션 파이터(매파)’라고 불렸고,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신속한 통화정책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10년 3월 31일 이임식을 마친 이성태(오른쪽) 전 한은 총재. 왼쪽 옆으로 당시 부총재였던 이주열 총재가 보인다.

다음은 5~6일 두 차례 전화 인터뷰한 이성태 전 총재와의 일문일답.

- 지금 한국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나.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경제 상황이 좋으니까 우리 경제 형편도 나아진 것은 맞는데 경제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은 상황이다. 산업별로 보면 철강·조선·자동차 등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산업이 약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 상황이 사실 걱정이다. 오래전부터 ‘다음 먹거리는 무엇이냐’는 논의가 계속 있었지만 앞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고 나갈 새로운 주력 산업이 잘 보이지 않는다.”

- 지난해 3%대 성장률을 회복했다고 하지만 성장세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으로 가까이 가면서 성장 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 성장이 정체되는 기간이 좀 길어지고 있다. 경제를 이끌 새로운 기업들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끄는 기업은 30년 전에 경제를 주도하는 기업들과 별 차이가 없다. 기업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서 경제를 끌어가야 하는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특정 산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기업할 수 있는 의욕,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는 무엇인가.

“가계부채가 매우 골치 아픈 문제다. 내가 한은 총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당시(2010년) 가계부채가 700조원 규모였다. 지금 1400조원이 넘어 두 배 수준이 됐다. 퇴임 직전 ‘우리 경제에 가장 큰 숙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고민 끝에 가계부채라고 답변했다. (막대한 가계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인 것 같다.”

- 물가에 미치는 수요측 압력도 높지 않은 상황이다.

“가계부채와 같은 비용 부담이 큰 상황이기 때문에 물가에 영향을 주는 수요 압력이 크지 않다. 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저물가 시기를 지났지만 가격 상승 요인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문제가 앞으로 경기를 괴롭히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

- 이런 상황에서 한은의 통화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운용돼야 하나.

"다른 경제 정책도 그렇지만 통화정책은 물가와 자산가격, 경기, 국제자금 흐름을 모두 보고 가까운 장래에 최선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한은은 발권력, 본원통화를 조절하는 수단을 사용해 경제 안정과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 통화량을 조절하고 금리 수준을 결정해 경제 수준, 물가, 자금유출입 등 경제에 영향을 주는 것이 한은의 역할이다. 물론 다른 작은 수단들도 있지만 대표적인 한 개 통화정책 수단을 가지고 모든 경제 목표를 다 달성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미국의 통상 압박이 강화되는 등 대외 경제 환경이 좋지 않다. 한은의 역할은 무엇인가.

"말했다시피 한은은 자신이 가진 수단으로 최선의 결정을 한다. 국제적인 통상 압력이 있어도 한은이 대처할 수는 없다. 우리 경제가 어려움에 부닥친 부분이 있겠지만 한은이 가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한은에 부여된 수단으로 최선의 결정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

- 이 때문에 금융감독 기능 등 한은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금융감독을 어떤 조직이 담당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감독이 특정 목적을 위해 동원되지 않고 금융감독 본연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통화정책의 독립성 못지않게 금융감독의 중립성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인 목적에 휘둘리지 않고 중립적으로 추진되는 금융감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동안 한은의 독립성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금융감독 중립성은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과거 관행적으로 금융감독은 중앙은행의 역할이라고 봤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금융감독의 중립성이 포함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 등 주요국에서는 중앙은행이 금융감독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역할도 커졌다. 우리나라는 중앙은행과 금융감독원이 분리돼 있다. 금융감독의 중립성 논의는 나중에 금융감독에 대한 중앙은행의 역할을 확대할 것이냐, 아니면 유럽중앙은행(ECB)처럼 새로운 기구를 둬서 중앙은행이 금융감독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냐는 추가 논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정책 수단이 많지 않은 한은이 외부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보나.

"중앙은행의 소통과 관련해서는 오랜 흐름이 있다. 경제 상황에 따라 중앙은행의 소통도 그때그때 차이가 있는데, 지금 유행하는 것이 반드시 정답인 것은 아니다. 위기 당시 제로 금리를 운영하는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더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기껏해야 국채나 모기지 사들이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말로 하는 정책'이 대안이 됐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역시 예전에도 많이 말하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지금은 각 지역 연방은행장들까지 연설에 나서는 등 다방면으로 발언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중앙은행이) 말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고 절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외국 사례나 유행을 따라가도록 압력을 많이 받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것이 꼭 좋지만도 않지만 그렇다고 '깜깜이'로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주열 총재가 4년 더 한은을 이끌게 됐다. 이 총재의 가장 큰 책임은 무엇인가.

“앞으로 4년은 수습하는 일이 남았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정책금리 수준이 세계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제 구조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금리 정상화 과정에서 충격 없이 매끄럽게 통화정책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