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여성 근로자가 유산하거나 출산한 자녀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산업재해로 봐야 할까요. 2009년 제주 소재 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이 9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9년 제주의료원에서는 임신한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하고 7명의 신생아 중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당시 해당 간호사들은 인력 부족으로 심각한 업무 과중 상태였습니다. 임신 중인 간호사들이 병동에서 항암제 등 해로운 약품을 보호장비도 없이 절구에 갈아서 포장할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간호사들과 근로복지공단 간의 법정 공방으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사법부도 엇갈린 판단을 내렸습니다. 2014년 12월 서울행정법원은 “태아의 건강손상은 모체의 건강 손상에 해당하므로 태아들은 산재 심사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번 사례는 산재에 해당한다'라고 판결해 1심에서는 근로복지공단이 패소했습니다. 반면 2016년 5월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수급자는 본인으로, 태아는 근로자 당사자가 아니며 태아는 독립된 인격체’라는 이유로 태아에 대한 산재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갖고 태어난 자녀들이 초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해법을 찾지 못한 채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입니다. ‘이들 태아에 대한 산재 보상을 인정해줄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수년째 계속되면서 논의가 공회전하자 노동계와 국회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개정하거나 모성 보호에 관한 규정 입법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의료기관 입원실에서 간호사가 입원 환자를 돌보고 있다. 사진은 해당 기사 내용과 무관하다.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는 ‘제주의료원 사례로 보는 여성 노동자 모성보호 강화를 위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고 해법 마련을 위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이날 여성가족부의 연구 용역 사업을 수행한 이현주 우송대 보건복지대학 간호학과 교수는 국내 산업안전보건법 상에 임신 노동자의 모성 보호를 위한 직장 내 안전·보건 정책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산업안전보건 규칙상에 명시돼있는 ‘수두와 풍진 등 선천성 기형 유발 감염병 환자 접촉 제한과 기형 검사’가 유일한 임신 노동자 제한 업무라는 것입니다.

이현주 교수는 “국내 산재보험법 상에 임신 노동자의 모성 보호를 위한 사후 관리 구제 방안이 전혀 없다”며 “국내 법체계에서 재해 인정 프레임을 ‘광업, 제조업, 건설업 등의 굴뚝 산업에서 발생하는 사고(事故)’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교수가 공개한 ‘2017년 고용노동부 내부 자료’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의 연간 유산은 4만여건이 넘지만 5년 동안 임신 관련 업무상 재해 신청은 8건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승인은 4건에 그쳤습니다.

이 교수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 근로자 수가 계속 늘고 있지만, 정작 여성 노동자 건강에 관한 근로 감독이 이뤄진 적이 없었다”면서 “임신 중인 노동자가 업무상 부상이나 질병, 출퇴근 재해로 인해 출생한 자녀가 건강 손상이 됐거나 우려가 있어서 이에 필요한 요양을 시행한 경우, 여성 노동자를 비롯한 출생한 자녀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업무상 재해 인정은 사용자의 법적 보상 책임의 범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영역이며, 임신 노동자를 위한 작업 환경 개선 등 재해 예방 및 근로 시간 관련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선순환 역할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서울대병원노조 분회장인 현정희 의료연대본부장은 “제주의료원 사태는 대한민국 모성 보호의 민낯을 보여준 사태”라면서 “국내 산재는 엄마와 자녀가 한 몸으로 이어져 있는 ‘탯줄’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현정희 본부장은 “최근 임산부 근무시간 단축 등 정부가 내놓은 모성 보호 대책은 3교대를 하는 병원 종사자들에게는 실효성이 없다”면서 “지금도 개인에게 동의서를 받고 임산부에게 야간 근무를 시키고 하혈을 하는 임부에게 근무를 강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 본부장은 “병원은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 방사선, 독성 약물 등으로 위험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하는 작업 환경 측정은 일반 사업장과 그 기준이 거의 다르지 않다”며 “병원 사업장의 특수성을 고려한 병원 노동자와 치료 환자에게 해로운 생물학적 요인들과 보호장치에 대한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정부도 임신 중 태아의 건강 손상에 대한 보상책 마련을 검토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주평식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 과장은 “유산, 사산이나 출산한 자녀의 건강 손상이 있는 경우에 태아에 대해서도 산재로 보상하는 등 노동자의 보상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면서 “올해 안에 임신 중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상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실시하고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법안 발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주 과장은 “독일을 제외하고 태아에 대한 산재 보상을 인정하고 있지 않아 비교 사례가 부족한 데다 보상 체계를 어떻게 강화할지, 구체적으로 보험 급여의 범위와 지급 요건, 지급 기준 규정을 어떻게 마련할지 등 구체적인 산재보험체계 적용 방안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