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대표자회의 사용자 대표인 한국경영자총협회가 회장과 부회장이 모두 공석인 초유의 상황을 맞게 됐다. 회장과 부회장이 한꺼번에 공석인 것은 1970년 경총 설립 후 처음이다. 경총은 3월 초 예정인 노사정대표자회의 전까지 차기 회장을 선임한다는 계획이지만, 기업 측 입장을 자유롭게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여서 후임 회장 선임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총은 22일 정기총회 및 신임 회장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회를 열었지만, 신규 회장을 선임하지 못했다. 애초 경총 회장단은 전(前) 중소기업중앙회장(현 대구 경총 회장)인 박상희 ㈜미주금속 대표를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대기업 회원사가 반대하면서 불발됐다.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 회원사들은 박 대표가 경총을 대표하기에 ‘급’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박병원(오른쪽 8번째)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과 박상희(오른쪽 3번째) 대구 경총 회장이 22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49회 정기총회 및 한국 노사협력대상 시상식’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첫 중소기업 출신 경총 회장이 될 뻔했던 박 대표는 총회 후 “전형위원 6명 중 5명이 대기업 관계자이고 중소기업 출신을 1명 밖에 없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경총은 이날 윤여철 현대차(005380)부회장, 김영태 SK(034730)부회장, 박복규 전국택시연합회회장, 권영수 LG유플러스(032640)부회장, 정지택 두산중공업부회장, 조용이 경기 경총 회장 등 6명을 전형위원으로 선정해 회장 선임안을 논의했다. 경총은 이르면 이달 말에 다시 전형위를 열어 차기 회장 후보를 결정할 계획이다. 회장직을 사퇴한 박병원 전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이날 사의를 표명했다. 관례적으로 경총 부회장은 경총 회장이 지명하기 때문에 회장이 바뀌면 부회장은 사의를 표명한다. 재계 관계자는 “박상희 대표가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김 부회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아는데, 차기 회장 선임이 무산되면서 애매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나중에 선임될 차기 회장이 다시 지명하면 부회장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

경총은 최대한 빨리 차기 회장을 뽑겠다는 계획이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 공백이 길어질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경총은 기업 측 입장을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친(親)노동계 성격이 강한 문재인 정부에서 누가 선뜻 나서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경총은 작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을 비판했다가 곤경을 치렀다. 당시 김영배 부회장은 “사회 각계의 정규직 전환 요구로 기업들이 매우 힘든 지경이다. 논란의 본질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라고 말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이 바로 다음 날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후 경총은 정부의 정책 협의 과정에서 배제됐고, ‘경총 패싱(passing·배제)’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2015년 3월에 공식임기를 시작한 박병원 전 회장은 임기가 끝나기 전부터 “(후임자를) 열심히 찾아보겠다”며 연임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고, 주변의 만류도 끝내 거절했다.

업계에서는 경총 회원사들이 손경식 CJ 회장을 차기 경총 회장으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경총은 부인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을 함부로 얘기했다가 ‘찍히는’ 상황에서 경총 회장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자리”라며 “공백이 길어지면 최저임금 등 각종 노동정책 수립에도 차질이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