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이 군산공장 폐쇄를 결정하면서 한국 시장 전면 철수설이 가중되는 가운데 GM의 노사(勞使) 관계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첫 단추로 꼽히고 있다. 그간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는 글로벌 경기 부침(浮沈)에 따라 뼈를 깎는 구조조정 과정을 거쳤다. 대부분 사례에서 노조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생사(生死)가 갈렸다. 한국GM 역시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댄 암만 GM 회장은 최근 "군산 이외 나머지 영업장(부평·창원공장)의 미래는 한국 정부, 노조와 협의를 바탕으로 수주 내 결정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호주는 노조의 무리한 요구 탓에 결국 글로벌 완성차 3사(社)가 모두 철수하면서 자동차 산업 불모지가 됐다. 반면 스페인은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 없이도 세계 8위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한국GM이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호주, 실적 나빠도 노조 양보안해… 5萬 일자리 증발]

12년간 정부지원 5조원 받았지만 업체들 경영 나아지지 않아 '포기'

거의 100년 전인 1925년 미국 포드사(社)가 호주 빅토리아주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세웠다. 1931년엔 조립 업체였던 홀덴이 GM의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자동차 생산 업체로 탈바꿈했고, 1963년엔 일본 도요타가 호주 현지 생산을 시작하며 포드, 홀덴(GM), 도요타 3사 체제가 구축됐다. 2000년대 중반까지 연간 40만대에 달하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호주의 자동차 생산은 '제로(0)'다. 2016년 포드, 작년 도요타와 GM이 잇따라 철수하면서 자동차 산업이 완전히 몰락한 것. 연간 18조원에 달하는 자동차 산업이 한순간 사라졌다. 5만명의 일자리도 없어졌다.

GM 총괄 부사장과 한국GM 사장, 국회서 여야 지도자 면담 - 배리 엥글(오른쪽) GM 총괄 부사장이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각 정당의 한국GM 대책 TF 관계자와 면담하기 전에 물을 마시고 있다. 왼쪽은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

호주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광산업으로 인력이 몰리자, 자동차 산업은 구인난을 겪고 임금은 수직 상승했다. 호주 정부는 2000년부터 2012년까지 5조원에 육박하는 보조금을 지원했지만, 차 업체의 경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12년 GM홀덴 노조는 3년간 22%의 임금 인상을 관철했다. 호주 도요타 노조도 3년간 임금 12%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2013년 호주 정부가 보조금을 폐지하자 자동차 3사는 2016~2017년 사이에 모두 철수했다.

한때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이었던 영국도 과정이 비슷하다. 영국의 차 산업 몰락의 주요 원인으로 노사 갈등에 따른 비용 상승과 생산성 저하가 꼽힌다. 한 회사에 10여 개의 노조가 난립하면서 세력 다툼을 벌였고 생산성은 갈수록 악화됐다. 결국 1980년대 말부터 애스턴마틴, 재규어·랜드로버 등 영국의 주요 브랜드들은 해외에 매각됐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호주는 자동차 산업 경쟁력이 약화하는 상황에서도 노조가 임금 인상 추진, 고비용의 복리 후생 유지 등 기득권을 놓지 않아 붕괴한 측면이 크다"며 "한국 차 산업 상황이 호주와 비슷한 만큼 호주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페인, 자국 메이커 없이도 車생산 세계 8위 우뚝]

노사 대립에 공장철수 상황 처하자 정부, 법 바꿔 고용 유연성 높여

2007년 스페인은 3%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프랑스 자동차 업체 르노의 스페인 바야돌리드 공장은 신차 모델 실패와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경제 위기가 겹치며 폐쇄 위기에 놓였다. 이 공장 생산량은 연평균 29만대였지만, 2008년엔 3분의 1인 10만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회사는 '1일 3교대' 근무를 '1일 1교대'로 변경하자고 노조에 제안했다. 인건비 절감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에 노조는 고용과 임금 보장을 요구하는 파업으로 맞섰다. 가족과 지역 주민 1만6000여 명도 동참했다.

벼랑 끝 대치가 바뀐 계기는 르노가 공장을 포기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지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노조는 결국 임금 동결, 초과 근무 수당 양보, 근로시간 탄력적 운영에 동의했다. 회사와 노조가 고용과 임금을 '빅딜'한 것이다. 이 과정에 스페인 정부의 역할도 컸다. 2012년 해고를 쉽게 하고, 경영 상황이 어려울 때 노사 협의 없이도 사측이 단체협약 일부를 변경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바꿔 고용 유연성을 높였다.

경기 상황에 따라 해고와 채용이 쉬워지자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잇따라 스페인 투자에 나섰다. 2016년 2월 폴크스바겐그룹은 나바라 공장에 10억유로를 투자하기로 했고, 그해 5월 르노는 2020년까지 7억5000만유로를 투자해 2000명을 더 고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벨기에 공장을 철수한 포드도 스페인에 23억유로 투자 프로젝트를 내놨다. 2012년 198만대였던 스페인 자동차 생산은 2016년 289만대로 늘었다.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 없이도 유럽 2위, 전 세계 8위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獨·日, 위기 때마다 구조조정 타협… 경쟁력 지켜]

회사는 고용 유지에 힘쓰고 노조는 임금 삭감도 감내하고

1990년대 유럽 거리에는 일본 차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여파로 독일 폴크스바겐은 직격탄을 맞았다. 서유럽 시장의 내수도 감소하며 수출 물량이 줄었다. 1993년 폴크스바겐의 차 판매는 전년보다 14% 급감한 296만대에 그쳤고, 1조3000억원 적자를 봤다. 결국 폴크스바겐은 1995년까지 전체 근로자의 30%에 이르는 3만여 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자 폴크스바겐 노조는 1993년 사측과 근로시간 유연화에 합의했다. 2년 동안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근로시간 단축과 임금을 삭감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임금에 차등을 두는 이중 임금제도 도입했다. 이 조치로 정리해고 없이 2만1000명 감원에 해당하는 비용 절감 효과를 얻었다.

2000년대 초 해외 생산이 증가하면서 독일 내 생산이 감소하는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폴크스바겐 노조는 자발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는 조치를 취했다. 노사관계 안정을 바탕으로 폴크스바겐은 성장을 거듭해 2016년부터 세계 1위 자동차 생산 업체로 올라섰다.

도요타의 노사 합의는 역사가 더 길다. 1950년대 도요타 사측은 경영 위기를 맞아 인원 감축을 시도했다. 노조는 2개월간 파업했지만, 사측은 1500여 명을 해고했다. 노사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도요타 노조는 대립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전환을 이룬다. 1962년 노사 협력을 선언한 뒤, 노조가 주도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회사가 어려웠던 2003년부터 4년간은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했다. 1962년 이후 56년간 무파업이다. 대신 사측은 일본 내 생산을 300만대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우리도 폴크스바겐과 도요타처럼 안정적 노사 관계를 통해 국내 생산 물량을 유지하고 산업 경쟁력을 키워가야 노사 모두 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