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오래된 서울 강남권 아파트라도 당장 무너질 정도가 아니라면 재건축이 사실상 어렵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재건축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첫 단추인 안전진단 평가항목에서 주관적 평가가 가능한 주거환경 비중이 대폭 줄고 기술적 평가 항목인 구조안전성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업계는 사실상 재건축 연한을 연장한 것과 다름없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당장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는 강남이나 양천구 목동, 노원구 상계동 재건축 아파트는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충족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재건축 연한 도래 단지 중 안전진단 미진행 가구는 총 10만3822가구에 이른다.

서울 양천구 목동 아파트 단지.

◇“무너지기 직전 아니면 재건축 안 돼"

국토부는 20일 발표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 정상화 방안’을 통해 재건축 안전진단 평가 항목 중 구조 안전성 비중을 20%에서 50%로 늘리고, 주거환경 비중은 40%에서 15%로 줄이기로 했다.

아파트가 낡고 오래돼 생활이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무너질 수준이 아니라면 쉽게 재건축 안전진단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만 국토부는 주거환경이 극히 나쁜 수준인 ‘E등급’을 받으면 다른 항목 평가와 상관없이 바로 재건축을 할 수 있는 예외조항을 뒀다.

국토부는 최근 이뤄지는 재건축이 구조적으로 안전한데도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사회적 낭비’라고 정의했다. 국토부는 구조안전성 확보라는 본래 취지대로 안전진단이 이뤄지도록 구조안전성 비중을 늘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건축 안전진단 제도는 참여정부 출범 이듬해인 2003년 도입됐는데, 당시엔 ▲구조 안전성(45%) ▲설비 노후도(30%) ▲주거환경(10%) ▲비용편익(15%) 평가로 이뤄졌다. 2014년 9·1 대책을 통해 2015년부터 구조안전성 가중치가 20%까지 내려갔지만, 이번 조치로 다시 참여정부 시절(2006년 50%) 수준으로 돌아가게 됐다.

국토부가 구조안전성 가중치 조절을 통해 사실상 재건축시장에 규제를 가한 셈이다. 재건축 안전진단 제도는 재건축 사업이 필요한지를 검증하는 장치인 만큼 당장 재건축을 추진 중인 서울 강남구, 노원구, 양천구 목동 아파트 단지는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적으론 공급 위축, 가격 급등 우려”

업계는 이번 안전진단 강화로 재건축 초기 단지의 가격 급등은 어느 정도 진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는 재건축 연한 30년을 충족했더라도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어, 안전진단을 통과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서울 재건축 연한 도래 단지 중 안전 진단을 진행하지 않은 가구만 10만3822가구에 이른다. 이 중 양천구가 2만4358가구로 가장 많고 노원구(8761가구), 강동구(8458가구), 영등포구(8126가구) 순이다. 강남구도 7069가구에 이른다.

올해 14개 단지 모두가 재건축 연한을 충족하는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의 경우 안전진단을 받기 전인 지난해부터 이미 개발 기대가 커지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양천구 아파트값은 지난해 5.31% 상승했고, 올 1월에만 1.88% 올랐다.

그러나 안전진단 강화가 재건축을 어렵게 해 장기적으로 공급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새 아파트 선호 현상이 뚜렷한 상황에서 서울 시내에는 재건축 외에 신규 아파트 공급 수단이 마땅치 않다. 재건축 조합원 지위양도 금지, 초과이익환수제 등 정부가 기존에 내놓은 대책들까지 더해지면 당분간 재건축을 통한 신규 공급은 어려워질 전망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전문위원은 “재건축 안전진단 강화는 기존 조합원 지위양도 금지와 초과이익환수제 부활, 분양가상한제 도입 가능성 등과 더불어 재건축에 ‘4중 족쇄’를 채운 셈”이라며 “재건축 첫 관문인 재건축 안전진단이 강화되면서 연한만 채우면 재건축이 될 것이라는 과도한 기대가 사라지고 초기 단계 재건축은 거품이 꺼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안전진단 강화가 초기 재건축 단지의 사업 추진을 둔화시켜 강남권 집값 상승이 외곽으로 번지는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문제는 서울에 노후 단지가 상당히 많다는 점”이라면서 “새 아파트를 찾는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낡은 단지를 헐고 새로 짓는 도시정비사업을 막으면 오히려 수급 불균형과 양극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