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 임기 보장만으로 독립성 유지되지 않아
"日 중앙은행장 요건, 영어·커뮤니케이션 능력·체력"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다음달 31일 만료되면서 누가 신임 한은 총재가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사청문회 일정을 고려하면 적어도 다음달 초에는 후보자가 지명돼야 한다. 2014년 임기를 시작한 이주열 총재도 그해 3월 3일 지명됐다. 자천타천 차기 한은 총재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은 많지만 하마평이 나오는 후보자 수만 늘어날 뿐 유력한 후보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 수장도 올해 교체됐거나 곧 선임될 예정이어서, 주요국 신임 중앙은행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새로운 한은 총재를 지명해야 하는 우리나라에 좋은 참고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재닛 옐런의 뒤를 이어 제롬 파월 신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취임했고, 일본은행(BOJ)은 이달, 중국 인민은행은 다음달 총재를 공식 임명할 계획이다.

◇ 독립성 논란 나온 美 연준·ECB 사례에서 교훈 얻어야

이달 새로운 수장을 맞이한 미 연준에서는 독립성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옐런 의장이 정치적인 의도로 인위적으로 초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연준을 흔들면서 시작됐다. 결국 옐런 전 의장은 지난 4년 동안 안정적인 통화정책을 펼친 것으로 평가되고도 전임 의장들과 달리 연임하지 못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사상 처음 비(非)경제학자 출신 파월을 의장에 지명했다.

학계에서는 정치에 거리를 둔 학자형 의장의 시대가 저물고 파월과 같이 이론보다는 정부의 역학관계에 정통한 ‘제너럴리스트’가 중앙은행을 지휘하게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유지되기 위한 두 가지 전제는 통화정책 목표에 대한 위원회의 합의가 존재하고, 전문적인 이코노미스트로 구성된 위원회가 통화정책을 주도하는 것인데, 최근 첫 번째 전제가 깨졌고 두 번째 전제도 불투명해졌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사상 처음 비(非)경제학자 출신 제롬 파월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임명했다.

비토르 콘스탄시오 부총재 임기가 5월 끝나고 내년에는 새로운 총재도 선출해야 하는 유럽중앙은행(ECB)에서도 독립성 논란이 불거졌다. 유로존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중앙은행 고위직을 맡는 ECB 특성상 누가 총재와 부총재에 임명되느냐에 따라 통화정책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력한 차기 ECB 총재 중 한 명인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는 ECB의 양적완화 정책에 줄곧 반대 의사를 밝힌 ‘매파’다.

오랜 기간 독립성을 보장받았던 미국·유럽 중앙은행에서 독립성 논란이 가열되면서 새로운 총재를 지명해야 하는 우리나라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위기를 지나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점점 커졌고, 이에 따라 정치적 입김에 중앙은행 정책 결정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커졌다”며 “중앙은행 총재 임명 과정에서 독립성 논란이 나오는 주요국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단순히 총재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한은의 독립성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금융 분야에 정통하고 정부와 정치권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사가 차기 총재에 선임돼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즉각 행동할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신뢰를 얻은 중앙은행은 경제가 나빠질 때 기준금리를 내리는 데도 자유롭다”며 “세계 경제가 호황을 겪고 자산 가격이 오를 때 문제들은 정치와 거리를 둔 전문가에 의해 가장 잘 통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글로벌 감각, 정책 연속성은 한은 총재 필수 요건

일본과 중국도 신임 중앙은행장 선임 과정을 밟고 있다. 일본과 중국 정부는 글로벌 경제에 대한 식견과 정책 연속성을 신임 중앙은행장의 핵심 자격요건으로 보고 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일본은행 총재가 갖춰야 할 요건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아소 총리는 “글로벌 금융 이슈를 다뤄야 하는 일본은행 총재에게 영어 구사 능력이 아주 중요한 요건”이라며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을 국회에 설명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체력도 함께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외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를 연임시키는 인사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구로다 총재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지내며 영어 실력은 물론 글로벌 네트워크도 쌓았다.

일본 정부가 57년 만에 처음 일본은행 총재 연임을 결정하면서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2023년까지 일본은행 총재를 맡게 될 예정이다.

저우 샤오촨 총재가 물러나는 인민은행의 경우도 신임 총재에 영어 구사 능력과 글로벌 감각이 요구된다. 유력한 차기 인민은행 총재 후보로 거론되는 궈수칭 은행감독위원회 주석은 국제무대에서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국제통으로 꼽힌다.

거시·금융 분야 한 교수는 “소규모 개방 경제인 우리나라 특성상 국내 요인만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면 예상치 못한 대외변수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며 “글로벌 경제를 조망할 수 있는 폭넓은 시야와 다른 나라 중앙은행의 정책 대응,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한은 총재에 필요한 능력”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강화된 상황에서 정책 연속성도 고려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반세기 만에 처음 일본은행 총재의 연임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구로다 총재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일본은행의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이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 나가는 힘이 됐다”고 평가했다. 궈 주석이 신임 인민은행 총재 후보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저우 총재와 시장개혁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은행 역시 정책 연속성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다.

◇ 참여정부 시절 인사 하마평…이주열 총재 연임설도

문재인 정부와 함께 임기 4년을 보내야 하는 차기 한은 총재에는 참여정부 시절 활동한 인사들이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참여정부 시절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고,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낸 박봉흠 전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이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고 참여정부 시절에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와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이었던 박상용 연세대 명예교수도 신임 총재 후보로 꼽힌다.

한은 출신으로는 이광주 전 부총재보, 김재천 전 주택금융공사 사장, 장병화 전 부총재가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이주열 한은 총재의 연임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