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엔젤 투자자나 벤처캐피털 회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도 투자 카페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죠. 이 카페는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과 이들에 투자하는 엔젤 투자자, 벤처캐피털 회사들이 만나는 회원제 카페입니다.

스타트업은 여기에서 자신의 사업 계획을 설명하고 우수한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인정받을 경우 투자를 받아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실리콘밸리 IT(정보기술) 기업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통해 창업했습니다. 이후 회사가 성장해 안정적 궤도에 진입하면 각종 평가를 거쳐 나스닥(NASDAQ·미국 장외 주식시장)이나 유가증권시장에 상장(IPO)도 하게 되죠.

최근 들어 스타트업이 엔젤 투자자나 벤처캐피털 회사들을 찾아다니지 않고도 자금을 모집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바로 ICO(Initial Coin Offering·가상 화폐 공개)입니다. 최근 가상 화폐 시장이 각국 정부의 규제 강화 등으로 열풍이 한풀 꺾인 상태이지만 ICO라는 가상 화폐의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장의 관심이 높습니다. 가상 화폐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상 화폐 개발 초기 단계부터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이 직접 모금

ICO는 간단히 말해 인터넷에 '백서(white paper)'라는 가상 화폐 사업 계획서를 발표하고 필요한 자금을 투자받는 방식입니다. 중간에 소개하는 조직이 없는 쌍방(P2P) 거래가 특징입니다. 대신 거래를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2009년 이후 등장한 블록체인(block chain·분산 저장 거래 시스템)을 이용합니다. 투자는 현금 대신 기존 가상 화폐로 받습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이 주로 사용됩니다.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을 산 뒤 이를 다시 ICO를 하려는 업체에 보내는 식입니다.

주식시장의 기업공개(IPO)와 가상 화폐 공개(ICO)를 용어가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IPO는 어느 정도 성장해 자리를 잡은 기업들이 소정의 평가를 받고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입니다. 반면 ICO는 신생 스타트업이 인터넷에 사업 계획서를 발표하고 필요한 자금을 투자받는 행위입니다. 엔젤 투자자나 벤처캐피털 회사들은 법정통화로 투자하고 일정 지분을 받지만 ICO는 가상 화폐로 투자하고 지분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스타트업의 사업 계획 실행 가능성과 그들이 내놓은 가상 화폐의 미래 가치를 예상하고 투자한 뒤 그 대가도 새로 생겨난 가상 화폐로 받습니다.

지난달 31일 김종협 더루프 대표가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가상 화폐 ‘아이콘’ 공개 행사에서 아이콘의 원리와 향후 계획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이 행사에는 미국, 홍콩, 유럽 등의 가상 화폐 업계 종사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세계 최초 ICO는 2013년 7월 마스터코인(Mastercoin)입니다. 2014년에는 이더리움이 12시간 만에 3700비트코인(당시 230만달러 상당)의 ICO에 성공했습니다. 2017년 8월까지 ICO 최소 400여 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지난해 세계 ICO 동향을 보면 한국의 현대BS&C가 가상 화폐 '에이치닥(HDAC)'으로 ICO 역사상 최고 금액인 2억5800만달러(약 2800억원)를 모아 1위를 차지했습니다. 현대가(家) 3세인 정대선 현대BS&C 사장은 HDAC을 이용해 핀테크(IT를 결합한 금융 기법)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HDAC의 뒤를 이어 파일코인(Filecoin)이 2억5700만달러를 모아 2위를 차지했습니다.

작년 중반부터는 일반 벤처기업들의 공모(公募)로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5월 인터넷 브라우저 브레이브(Brave)가 30초 만에 3500만달러를 모집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메신저 앱 킥(Kik)이 16만8732이더리움 모집에 성공했습니다. 작년 6월부터는 벤처기업들이 엔젤 투자자·벤처캐피털사로부터 받은 자금보다 ICO를 통해 유치한 자금이 두 배 정도 많아지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ICO가 완전히 가상 화폐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원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셈이죠.

한국·중국은 ICO 금지

ICO는 리스크(risk·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사업 계획서대로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것인가'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추진된다고 해도 투자한 가상 화폐의 가격이 기대만큼 오를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반 투자자들은 사업 계획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투자자를 보호하려면 우선 ICO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분석해 투자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공시(公示) 기능이 강화돼야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사업 계획서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투자하는 '묻지마 투자'는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개인 투자자의 피해에 따른 경제·사회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은 증권법의 '적격 투자자 제도'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ICO의 적격 투자자는 기관투자자의 경우 은행과 투자회사 등으로 한정했습니다. 개인 투자자는 주(主) 거주지를 제외한 개별 또는 부부 합산 순자산이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이어야 합니다. 또는 최근 2년간 매년 연 소득 개별 20만달러(약 2억2000만원) 이상 또는 부부 합산 30만달러 이상의 개인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작년 9월 ICO를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시 기능 강화, ICO 생태계 조성을 통해 투자자를 보호해 나가는 외국과 달리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무조건 금지하는 바람에 ICO를 통해 국내서 창업하려던 스타트업들이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됐죠. 전 세계에서 ICO를 금지한 국가는 중국과 한국 두 나라뿐입니다. 미국·유럽·호주·싱가포르·홍콩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ICO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위스는 취리히 인근 도시 주크(Zug)를 '가상 화폐 밸리(Crypto Valley)'로 대대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펴, 전 세계 ICO 기업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ICO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원금 보장이나 수익을 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자금을 모으는 유사 수신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입니다. 이를 규제하면 벤처기업 창업 생태계가 악화돼 4차 산업혁명 추진이 저해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한국은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IT 강국입니다. 스마트폰, D램 반도체 등 많은 분야에서 세계 최강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초고속 통신망도 세계 최강입니다. ICO 금지와 같은 규제가 한국 벤처기업들이 스위스·싱가포르와 같은 국가를 찾아 나서게 만들고 있습니다. IT 강국을 바탕으로 디지털 금융에선 세계 중심지가 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ICO(Initial Coin Offering·가상 화폐 공개)

사업 계획서를 공개하고 가상의 코인을 발행해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 자금을 얻는 것. 현금 대신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 화폐로 투자를 받는다. 투자자는 향후 새로운 코인이 인터넷 거래소에 상장되면 매매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