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4대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 파산 직후인 2008년 10월 31일 오후 2시 10분(미국 동부 시각). 수백 명의 공학자와 컴퓨터 프로그래머에게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메일의 발송자는 나카모토 사토시(Nakamoto Satoshi)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메일에 첨부한 9장짜리 논문에서 조작이 불가능하고 개인 정보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거래의 투명성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획기적인 통화(通貨) 시스템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제안했다. 시스템에서 사용할 화폐의 이름은 컴퓨터의 정보 저장 단위인 '비트'와 동전을 뜻하는 '코인'을 합쳐 비트코인(bitcoin)이라고 지었다. 전 세계적 광풍(狂風)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상 화폐가 태동한 순간이었다. 10년이 지난 현재 비트코인의 총가치는 약 194조원에 이른다.

/그래픽=양인성 <br>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나카모토의 실체는 지금까지도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하지만 그가 가상 화폐를 통해 추구한 이상은 명확했다. 나카모토는 2009년 1월 최초의 비트코인을 직접 만들어낸 뒤 "완벽하게 탈중앙화(decentralized)한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금융기관이 금융거래 정보를 독점하면서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챙기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나카모토는 논문에서 "금융기관에 점차 더 비싼 수수료를 내야 하고, 금융기관은 사고를 막겠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더 많은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카모토는 블록체인(blockchain)이라는 데이터 저장 기술을 이용해 중개자가 필요 없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블록체인은 은행의 중앙 서버에 모든 것을 기록하는 대신 인터넷으로 연결된 참여자 개개인의 컴퓨터로 거래를 검증하고 블록이라고 불리는 거래 장부의 복사본을 각자 저장해 놓도록 한 것이다. 개인과 개인이 직접 거래를 하더라도 수많은 참여자의 컴퓨터 절반 이상이 승인해야 성사되는 구조다. 거래 기록을 조작하려면 비트코인 블록 하나가 만들어지는 10분 동안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는 컴퓨터의 절반 이상을 해킹해야 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비트코인 거래 장부를 기록하는 컴퓨터가 1만1600대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론적으로는 해킹이 불가능하다.

비트코인이 주목을 받은 것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외에도 미국발 금융 위기로 기존 금융권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또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글로벌 인터넷 기업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내는 데 대한 불만도 컸다. 가상 화폐 주창자들은 "페이스북이 개인과 친구·가족의 정보를 모두 독점하고, 아마존은 사용자의 신용카드 정보와 상품 구매 이력을 모두 파악해 정작 사용자 허락도 없이 이를 광고나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가상 화폐와 블록체인을 인터넷의 독과점 구조를 깨뜨려 시장을 다시 민주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도구로 보고 있다. 가상 화폐는 모든 권력이 주주에게 집중되는 주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가상 화폐는 발행에 참여한 프로그래머나 투자자는 물론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일반 사용자 누구에게나 가상 화폐를 보상으로 지급한다. 이론적으로는 인터넷이 만들어낸 현재의 세상보다 평등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다. 미국 최대 차량 공유 업체 우버는 시장이 커질수록 경영진·주주와 박봉에 시달리는 운전기사와는 불평등이 심화한다. 하지만 가상 화폐 기반의 차량 공유 업체는 설립자와 투자자뿐 아니라 시스템을 구축한 프로그래머와 운전기사, 심지어 회사 성장에 도움을 준 초창기 고객들에게도 가상 화폐로 보상을 해주기 때문에 훨씬 공평하다는 논리다.

가상 화폐의 경우에도 초창기에 발행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수익을 많이 챙기는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이들의 지분이 일반 회사보다는 훨씬 적고, 발행량이 늘어가면서 부의 규모도 줄어들게 된다. 김진화 한국블록체인협회 준비위원회 공동대표는 "가상 화폐와 블록체인은 인터넷의 경제 독과점을 해결할 구세주로 각광받고 있다"면서 "하지만 가상 화폐 거래소나 가상 화폐 발행을 주도한 사람들에게 다시 권력이 쏠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