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화폐 거래소 폐쇄를 검토 중"이라는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발언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청와대와 정부가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를 도입해 투명성을 높이고 자금 흐름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상 화폐 투자를 어렵게 만들겠다'는 취지의 기존 대책을 일단 추진하기로 했다. 가상 화폐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법무부가 한발 뒤로 빠지고,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경제 부처가 다시 정책의 주도권을 쥔 모양새다. 하지만 부처 간 정책을 조율하고 중심을 잡아야 할 청와대와 여당이 여론의 눈치만 살피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명제·자금출처조사·세금 3종 세트로 투기 억제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발표한 가상 화폐 실명제 도입 등 투기 대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14일 밝혔다. 가상 화폐 거래에 양도소득세와 거래세 등을 부과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 중이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강화된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에 따라 가상 화폐 거래 계좌 실명제를 강화해 나간다는 게 금융 당국의 기본 입장"이라며 "실명제만 철저히 도입해도 거래소 상당수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이 추진 중인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의 골자는 본인임이 확인된 가상 화폐 거래소 계좌와 동일한 은행의 본인 계좌 사이에서만 입출금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거래소가 은행에서 대량 발급받은 가상 계좌를 회원에게 임의 배정하는 방식이어서 이 가상 계좌가 누구 것인지, 이 가상 계좌로 흘러든 돈이 누구의 것인지 은행은 알 방법이 없다.

금융위는 실명 확인이 되지 않은 가상 계좌로는 입금이 불가능하고 출금만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실명 전환을 유도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자금 거래 내역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으며, 그 내역은 과세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기재부는 가상 화폐 거래에 양도세와 거래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이를 위해 해외 사례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미국·일본·영국·독일 등 대부분 선진국은 가상 화폐 거래에 양도세 또는 부가가치세 등을 매긴다.

당초 20일로 예정된 실명제 도입 시기는 빨라야 이달 말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법무장관이 가상 화폐 거래소 폐쇄 방침을 밝힌 후 일선 현장에 큰 혼선이 빚어지면서 전체 일정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가상 화폐 거래소 신규 회원 가입 재개도 늦춰질 전망이다. 지난달 28일 금융 당국이 실명제 도입 전까지 신규 회원에 대한 가상 계좌 제공을 중단시키자 빗썸과 업비트 등 대부분 가상 화폐 거래소들이 신규 회원 가입을 막아놓은 상태다.

◇청와대·여당은 여론 눈치 보며 침묵

청와대는 박상기 장관의 거래소 폐쇄 발언으로 큰 혼란이 벌어지자 "확정된 것이 아니다"고 말을 바꾼 뒤 14일까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28일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거래 실명제, 거래소 폐쇄 검토 등 강온(强穩) 대책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며 "정부나 청와대 사이의 이견은 없다. 청와대도 일관되게 이 대책을 유지하고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청와대 역시 가상 화폐 거래가 '투기'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그 연장 선상에서 거래소 폐지도 검토했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지난주 박 장관의 발언이 핵심 지지층의 반발로 이어지자 청와대는 한발 물러선 뒤 현재는 여론 추이만 관망 중이다.

여당 역시 가상 화폐 혼란에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2일 페이스북에 "진흥과 규제 사이의 적절한 지점을 정부 당국 간, 정부 여당 간 신중하게 조율하는 데 당정협의 등 다양한 형태로 논의를 거친 뒤 결론을 내려고 한다"고만 했다. 대변인단도 논평을 자제한 채 언론사 요청에 산발적인 구두 논평만 냈다.

이런 가운데 이날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 청원 코너에는 정부의 가상 화폐 시장 폐지를 반대하는 청원 참여인이 16만명을 돌파했다. 이 청원에는 "오락가락 정부에 서민들만 죽어가고 있다. 정부가 어떻게 책임질 거냐" "무능한 정부 지방선거 때 심판하자" 등의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청와대는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국민청원'에 대해 30일 이내에 청와대 수석이나 각 부처 장관 등 책임 있는 관계자가 답변하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