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대혼란이다. 지난 11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발언으로 50조원이 넘는 가상화폐 시장이 요동쳤다. 패닉에 빠진 투자자들은 거래소를 폐쇄하지 말라는 국민청원을 진행하는가 하면 가상화폐 거래에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의 퇴진을 청와대에 집단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는 부처간 조율된 사항이 아니다"고 뒤늦게 진화에 나섰지만 후폭풍은 계속되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12일에서야 “어제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은 총리실 산하 태스크포스(TF)내에서 논의되는 법무부 안일 뿐이다"고 말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정작 금융정책을 담당하는 금융위원회는 보이지 않았다.

가상화폐 거래를 위해서는 금융망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금융산업 감독을 담당하는 금융위가 적극 개입하지 않고서는 가상화폐 시장에 대한 관리·감독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금융위는 가상화폐 거래가 금융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직접 개입을 피하는 모양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가상화폐 규제의 조타수는 금융위가 되어야 할 것"이라며 "금융과 무관한 법무부가 가상화폐를 다루면 법질서 측면만 집중해 폐쇄라는 극단적인 규제안만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 ‘우왕좌왕’ 금융위에 ‘돌격 앞으로’ 법무부...청와대는 책임 떠넘기기?

박상기 법무부 장관

하루 거래금액이 50조원이 넘는 가상화폐 시장을 당장 폐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정책과 거리가 먼 법무부의 장관이 나서서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발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정부 안팎에서는 법무부가 지난해 12월 4일 법무실, 검찰국을 중심으로 가상통화 대책 전담팀(TF)을 발족하는 등 정부 부처내 가상화폐 규제법 마련의 주도권을 쥔 데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가상화폐 투기 열풍이 일자 가상화폐 규제에 대한 청와대의 기류가 강해진 것이 경제 부처 대신 법무부가 주무 부처로 지정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법무부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안에 대해 승인해 놓고 투자자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또 금융위 등이 골치아픈 가상화폐를 놓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도 법무부가 중심에 선 배경으로 해석된다.

정부 관계자는 "법 질서 확립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법무부 입장에서 가상화폐 시장은 온통 투기적인 요소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라며 "타 부처와 논의해 가상화폐의 기술적 효용성을 살폈어야 했는데, 다른 부처가 법무부에 책임을 떠넘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지난 11일 "가상화폐는 도박과 같다"며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를 목표로 한다"고 초강경 발언을 했다. 가상화폐 거래 행위 자체를 범죄로 인식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가상화폐 투기과열을 막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최소한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새로운 산업적인 측면을 고려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내놓는다.

현재 가상화폐에 관한 규제법안이 없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관리·감독 기능은 금융위에 있다. 하지만 금융위의 입장은 오락가락이다.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쇄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허용하겠다는 건지 명확한 입장이 없다.

금융위가 가상화폐 규제를 위해 준비 중인 법안은 유사수신법 개정안이다. 해당 개정안은 가상화폐 거래의 원칙금지·예외허용이다. 자금세탁방지의무, 실명계좌 등의 조건을 갖추면 거래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으로 보면 금융위는 가상화페를 금융상품으로 인정하지는 않되 거래는 허용하는데 방찍을 찍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 11일 국회 4차 산업혁명 특별위원회에 참석해 “(거래소 폐쇄 특별법을 만드는) 법무부와 같은 생각”이라며 “법무부 장관의 말씀은 부처간 조율된 것으로, 서로 협의하면서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금융위가 가상화폐 거래 규제안으로 준비했던 유사수신법 개정안과 최 위원장의 발언이 배치된 것이다. 유사수신법 개정으로 예외적 허용을 추진한 금융위가 돌연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쇄하겠다는 법무부와 의견이 같다고 하면서 시장의 혼란은 가중됐다.

◆ “가상화폐 거래, 금지냐 허용이냐”…정부 혼선으로 논란 가중

조선DB

정부는 12일 가상화폐 TF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 법무부의 폐쇄 법안에 대해 각 부처의 입장과 향후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나 뚜렷한 대안이 도출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도 이날 가상화폐 거래소에 계좌를 공급해 온 6개 은행(KB·신한·하나·우리·농협·기업은행) 임원을 소집했다. 현재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금감원이 진행 중인 가상화폐 거래계좌 점검 현황을 공유하고 각 은행의 가상화폐 거래계좌 공급에 대한 의견을 묻는 자리였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의 경우 가상화폐를 일반 상품으로 규정하고 선물거래까지 허용하고 있는 등 우선 해보고 잘못되면 그때가서 법을 고치는 방식으로 컨트롤하고 있다”며 “다만 우리는 법을 만드는 것도 어렵고, 또 만든 뒤 개정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법체계는 포지티브(법으로 허용되는 사안을 명시하고 그 외에는 금지하는 방안) 방식이기 때문에 한 번 법을 정립하면 이후에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처하기 힘들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투자자들은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예외적으로라도 허용하겠다는 것인지 방향을 못잡고 오락가락하는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가상화폐 규제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 인원은 2주일 만에 10만명을 넘어섰다. 전날까지 8만명이었던 참여 인원은 법무부 장관의 폐쇄발언 이후 하루만에 2만명이 늘어 10만5000명을 넘겼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는 가상화폐에 대해 일관되게 경고성 발언을 이어왔다”며 “다만 폐쇄와 예외적 허용은 분명 다르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이 정리되기 전에 섣불리 발표하는 것은 시장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