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과 커넥티드카 등 미래 핵심사업 영역에서 전략적 방향성을 구체화하고 글로벌 유수 기업들과의 협업체계 구축을 확대하겠다.”

윤여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지난 2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강당에서 가진 2018년 시무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의 발언을 두고 자동차 업계 전문가들은 그동안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다른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에 비해 다소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였던 현대차그룹이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나 자율주행 전문업체 등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본격적으로 기술개발에 속도를 높이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했다.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현대차가 선보인 아이오닉 자율주행차

예상이 적중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틀 후인 4일 현대차그룹이 미국의 자율주행 전문기업인 오로라 이노베이션(이하 오로라)과 손잡고 자율주행차를 함께 개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단순한 기술 제휴를 넘어 공동으로 자율주행 스마트스티를 구축하는 등 ‘동맹’ 수준의 긴밀한 협업에 해당된다.

현대차그룹은 오로라와의 협업을 통해 2021년까지 레벨 4 수준의 도심형 자율주행 시스템을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레벨 4는 운전자가 돌발상황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조건만 있을 뿐 사실상 완전한 자율주행 가능 단계에 해당된다. 그동안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만 몰두해 온 현대차그룹이 다른 분야의 글로벌 기업과 손을 맞잡기로 전략을 변경해 전세계 자율주행차 개발 경쟁의 ‘게임 체인저’로 나서겠다는 ‘선전포고’였다.

◆ ‘독자노선’ 대신 ‘연합군’ 전략 선택한 현대차

오로라는 구글에서 2009년부터 8년간 자율주행 기술을 총괄했던 크리스 엄슨과 테슬라의 오토파일럿 개발을 책임졌던 스털링 앤더슨, 우버의 인식기술 개발을 담당한 드류 베그넬 등이 2016년 12월 창업한 자율주행 전문업체다. 최근 자율주행차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각 업체들의 핵심인력들이 손을 맞잡아 ‘자율주행 분야의 드림팀’으로 꼽힌다.

그동안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는 오로라가 어떤 완성차 업체와 손을 잡을 지에 많은 관심이 쏠려왔다. 자율주행차 운영 솔루션과 소프트웨어를 전문으로 개발하는 오로라와의 전략적 제휴는 완성차 업체는 완전 자율주행차의 상용화 시간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여러 완성차 기업들은 물 밑에서 분주하게 오로라와의 협업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오로라가 다수의 완성차 기업들 대신 현대차그룹을 최종 파트너로 선택한 데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힘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의 미래 신성장 전략을 주도하고 있는 정 부회장은 지난해 하반기 자율주행 개발 담당임원 등을 대동하고 수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하며 공을 들인 끝에 오로라와의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오로라와의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투입될 현대차의 수소연료전지차

오로라와의 동맹 선언은 현대차가 신기술 개발에서 지금껏 고집해 온 ‘독자노선’ 대신 글로벌 기업과의 ‘합종연횡’으로 전략을 바꾼 첫번째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자율주행과 커넥티드카 등 신기술 분야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협업에 나서는 가운데, 현대차그룹은 고집스럽게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주력해 왔다. 자율주행과 연계되는 커넥티드카 분야에서 협업 대신 자체 차량용 소프트웨어 운영체제인 ‘ccOS(connected car operating system)’의 개발에 공을 들였던 것은 현대차그룹 특유의 기술 ‘독자노선’을 보여준 사례에 해당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16년부터 미국의 IT 솔루션업체 시스코, 중국 최대 인터넷 서비스업체인 바이두 등과 손을 잡았지만 주로 커넥티드카 분야의 일부 기술 제휴로 한정됐고 완전 자율주행차의 핵심기술에서는 협업이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로라와의 협업은 사실상 현대차그룹이 자율주행 분야에서 체결한 첫번째 ‘동맹 계약’에 해당된다.

현대차와 오로라가 자율주행 기술을 테스트 할 스마트시티의 가상 이미지

오로라와의 협업을 통해 현대차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전세계 자율주행차 개발 경쟁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는 다소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오로라가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서 핵심적인 인력들이 모여 만든 회사로 주목받고 있지만, 창업한 지 불과 1년여 밖에 되지 않은 스타트업 기업이라는 점에서 추가로 협업 대상을 늘려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오로라와의 협업은 거대한 전략 변화의 첫번째 ‘신호탄’이 됐다는 점에서는 주목해야 한다”며 “완전 자율주행차의 상용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분야의 글로벌 기업들과 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 자율주행 인공지능 기술 확보 시급…차량공유서비스에도 투자 확대될듯

.전문가들은 오로라를 파트너로 삼아 본격적인 기술 협업의 ‘포문’을 연 현대차가 향후 인공지능(AI)과 차량공유서비스 등 자율주행 상용화에서 필수적인 분야로 전략적 협업의 범위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자율주행차의 ‘두뇌’에 해당되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많은 완성차 업체와 ICT 기업, 부품과 전장업체들은 ‘연합군’ 수준의 밀접한 협력에 나서고 있다. 카메라와 각종 센서가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한다면, 이를 통해 수집하는 방대한 정보를 축적해 분석하고 상황에 맞게 주행하도록 명령하는 두뇌의 역할은 빅데이터 처리기술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AI)이 담당한다.

최근 완성차 업계는 그래픽처리장치(GPU) 분야의 1인자인 엔비디아 동맹과 세계 1위 중앙처리장치(CPU) 기업인 인텔 동맹으로 양분돼 있다. 빅데이터 처리와 차량용 AI 기술에서 인텔에 한발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 엔비디아와는 테슬라와 폴크스바겐, 메르세데스-벤츠, 포드, 볼보 등과 손잡고 있다. 현대차와 함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고집해 왔던 도요타 역시 지난해 5월 엔비디아 연합군에 합류했다. 지난 3월 모빌아이의 경영권을 사들이는 등 최근 활발한 인수합병(M&A)으로 엔비디아를 추격 중인 인텔은 BMW, 피아트크라이슬러(FCA) 등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CES에서 드론 기술 시연을 관람 중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정의선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이스라엘에 위치한 모빌아이 본사를 방문한데 이어 하반기에는 한국에서 암논 샤슈아 모빌아이 최고경영자(CEO)와 회동을 가졌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인텔과의 자율주행 인공지능 협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차량공유서비스 업체와 손을 잡거나 관련 분야에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완전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완성차 판매 대신 차량공유서비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자율주행차를 기반으로 한 공유서비스 시장이 자리를 잡게 되면 비싼 구입비와 유지비 등을 감수하면서 자가용 차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등이 미국의 호출형 차량공유서비스(카헤일링) 업체 리프트와 전략적 제휴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소프트뱅크도 지난해 말 세계 최대 카헤일링 업체인 우버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자율주행차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인공지능 분야의 경우 엔비디아와의 인텔의 기술 격차와 다른 ICT 업체와의 제휴 가능성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며 “향후 로열티를 주고 인공지능을 구입해 탑재할 지, 늦게나마 다른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처럼 협업에 나설 지 여부 등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유서비스는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법적 규제가 많아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단계적으로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하고 규제가 점차 완화되면 공유서비스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