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듣고 보니 너무 충격적이네요. 휴먼시아에 사는 아이는 ‘휴거(휴먼시아 거지)’, 주공아파트에 사는 아이는 ‘주거(주공아파트 거지)’라고. 이래서 어디 세상 살겠어요?”

“요즘엔 ‘빌거(빌라거지)’라는 말도 있더군요. 이런 거는 부모들이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무슨 집에 살고, 부모 직업은 뭐고 그런 것들부터 물어보니 애가 뭘 보고 배우겠나 싶더라고요.”

이웃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주거 문화가 만연화된 오늘날 이제는 아파트 브랜드가 주민들의 경제력을 드러내는 ‘신(新) 신분제도’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지난해 한 온라인 주부 커뮤니티에 거론되며 세간에 알려졌던 ‘휴거’ 논란이 여전히 잦아들지 않고 있다.

임대 아파트는 통상 좁고 저렴한 저소득층 전용 주거시설이란 이미지가 굳어지며 임대 주거자들을 차별화하는 사회적 문제까지 초래하고 있다. 상당수 지역에서 아파트가 사회 계층과 신분을 나누는 잣대로 간주되면서 일반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주민 간 갈등의 골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인근 아파트 단지.

◆ 꺼지지 않은 휴거 논란

휴거란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주변 시세보다 싼 값에 공급하는 아파트 분양·임대 브랜드인 ‘휴먼시아(Humansia)’와 ‘거지’를 더해 생겨난 합성어다. 학생들 사이에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휴거라고 놀리고 따돌리는 일이 심심치 않게 생기고 있다는 것도 더는 새롭지 않다.

휴거 논란은 앞서 2003년 서울시가 ‘소셜믹스(Social Mix)’라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소득 수준에 따른 거주자 간 갈등을 줄이기 위해 임대와 일반 주택을 같은 단지에 배치하는 ‘혼합 주택단지’를 만들면서 나타난 문제이기도 하다. 서울시 산하 SH공사에 따르면 소셜믹스 단지는 지난해 기준 서울에만 상암·마곡·발산·우면·장지동 등 183개 단지(11만9239가구)에 달한다.

그러나 집을 분양받은 입주자 중에는 임대 아파트에 사는 자녀들과 섞이는 걸 피하려고 공동체 시설(놀이터, 피트니스센터, 엘리베이터 등)이나 어린이집, 학교 입학 등에 차별을 두려고 하면서 임대 단지 주민들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단지 관리비와 시설 투자 비용 등을 두고 분양가구와 임대가구간 이견도 적지 않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요새 임대 아파트 기피 현상이 심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매매가가 높은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위장 전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며 “어른들의 일그러진 현실 인식과 이기주의가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도 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강남의 대규모 판자촌인 개포동 구룡마을은 오는 2020년까지 총 2692가구 규모의 주거 단지로 개발된다. 임대와 분양 아파트가 혼합된 ‘소셜믹스’ 단지가 들어선다.

◆ 구멍 뚫린 현행법…해결까지 먼 산

소셜 믹스에 따른 분양 입주자와 임차 가구 간 갈등은 현행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 분양주택은 주택법, 임대주택은 임대주택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관리규약과 관리비, 공용부문·부대시설 및 복리시설의 유지·보수와 관련해 합의점을 찾기 어렵다.

임차인들은 입주자들의 모임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 주택법상 입주자대표회의와 임대사업자만이 혼합 주택단지의 관리사항을 공동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차인대표회의가 구성된 혼합 주택단지에서는 임대사업자가 임차인대표회의와 사전 협의를 거친다.

최근 일부 단지에서 분양·임대가구 간 공동 운영으로 갈등을 해결한 사례가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혼합 주택단지에 있는 임대아파트 주민도 단지 내 시설 관리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공동주택관리법 일부 개정안’을 최근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혼합주택단지 공통관리규약 제정 및 개정, 재활용품 판매수입 등 잡수입 관리∙운영, 부대시설 및 복리시설 운영, 공동체 생활의 활성화 및 질서유지, 그 밖의 혼합주택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공동주택 대표회의에서 함께 결정하도록 했다.

김현아 의원은 “기존 혼합주택단지의 법령상 공백 때문에 입주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서 “입주자와 임차인, 임대사업자가 공동대표회의를 구성해 이해관계를 직접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관리비 점검을 하고 있다.

◆ 그릇된 인식부터 개선해야

결국 아파트 브랜드가 주민들의 경제력을 드러낸다는 인식부터 바뀌지 않는 한 이 같은 사회적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긴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일반 분양자와 임대 입주자들의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이 좁혀지기 쉽지 않은 문제”라면서 “임대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 낙인 효과가 생기는 것부터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잘못된 우리나라의 주거문화에 일그러진 주거 개념까지 겹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 세대로부터 주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다”며 “돈을 떠나 인성 교육 자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