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에서 일하는 직장인 박 모(35)씨는 수면제 처방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박 씨는 “야근이 잦고 너무 피곤한데도 정작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기가 일쑤”라고 토로했다.

박 씨는 오전 6시에 기상해 8시쯤 회사에 도착한다. 회사에서는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낮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 시간에는 밖으로 나간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피곤이 몰려오지만, 잠이 안오니 스마트폰으로 해외 뉴스를 찾아 보다 잠든다”며 “다음날은 피로감 때문에 아침부터 커피를 마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생체 리듬이 깨져 수면장애를 겪는 경우 ‘빛 공해’를 원인으로 의심해보라고 지적한다. 도시의 밝은 불빛, 발광다이오드(LED)와 같은 인공 조명, 스마트폰의 청색광(blue-light) 등이 생체 리듬을 관장하는 멜라토닌 분비에 영향을 주며 현대인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과 독일, 이탈리아 공동 연구진이 발표한 ‘세계 빛 공해 지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 국토의 89.4%가 빛 공해 지역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20개국(G20) 중 이탈리아(90.4%)에 두 번째로 빛 공해가 심각한 나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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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과 밤 거꾸로 된 빛 노출이 문제

“낮에는 우리가 필요한 양보다 빛을 부족하게 받고, 밤에는 지나치게 많은 빛을 받는 게 문제입니다.”

11일 수면의학 전문가 제이미 제이저(Jamie Zeitzer) 미국 스탠포드대 박사는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빛 공해 심포지움에서 “야간 과도한 청색광(blue-light) 노출은 불면을 유발하고 유방암, 전립선암 등 암 발생률을 증가시킨다”면서 “당뇨나 비만과 같은 대사 질환, 면역력 약화 등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사답 라만(Shadab Rahman) 하버드 의대 박사는 “생체 리듬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수치는 밤에 상승하고 낮에는 떨어진다”면서 “하지만, 밤 8시에 1만룩스(lux)의 밝은 빛을 받고 수면하면 멜라토닌 분비 시점이 지연되고 밤에도 분비량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11일 오후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빛공해 심포지움 기자간담회에서 제이미 제이저(Jamie Zeitzer) 미국 스탠포드대 박사, 사답 라만( Shadab Rahman) 하버드 의대 박사, 이은일 고려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이헌정 고려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사진 왼쪽부터)가 빛 공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대안 마련 필요성을 발표했다.

◆ 미세한 불빛도 뇌기능에 영향

최근 고려대학교병원 소속 이헌정, 윤호경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은일 예방의학과 교수, 가천의대 소속 강승걸 교수는 야간의 약한 빛이 인간의 뇌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했다. 야간의 빛 노출이 각종 동식물에 영향을 줘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보고는 있었지만, 인간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헌정 교수팀은 젊은 남성 20명을 대상으로 완전히 빛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틀을 보낸 후 3일째 밤에는 약한 빛(5 또는 10lux)에 노출된 상태에서 잠을 자도록 했다. 다음날 실험 참가자의 낮 시간 동안의 뇌기능을 확인한 결과 10lux의 빛에 노출된 경우, 하부 전두엽의 기능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쳐 작업 기억 능력의 저하로 나타났다. 작업 기억 능력은 단기기억의 일부로서 집중력과 인지능력, 감정조절, 식욕조절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0lux는 물체를 겨우 인식할 정도의 약한 빛이다.

◆ 종이책 vs 태블릿 전자책...독서 후 수면의 질 측정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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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이 종이책보다 수면의 질을 더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왔다.

라만 박사는 “실제로 종이책을 읽은 후의 수면과 태블릿 PC를 통해 전자책을 읽은 후 수면을 비교한 연구 결과, 종이책을 읽을 경우 더 빨리 잠들었고 렘(REM)수면 시간도 긴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수면 전문가들은 총 수면 시간 중 렘수면이 15~25% 정도는 차지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렘 수면 시간이 길면 수면의 질도 좋아진다.

라만 박사는 “현대인들에게 ‘저녁에 스마트기기를 사용하지 말라’ ‘청색광에 노출되지 말라’는 등의 해법은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다”면서 “독서를 돕는 빛, 수면을 돕는 빛 등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은일 교수는 “빛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이 필요하다”면서 “지자체는 주거 환경에 관심을 두고 조명을 관리해야 하며 정부도 빛 공해를 줄일 수 있는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