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배터리를 지배하는 자가 4차 혁명을 이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전기자동차, 자율주행차, 드론···.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로 수렴되는 최근 기술 경쟁의 핵심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더 작고 더 강력한 마이크로칩, 더 빠르고 더 저렴한 통신 네트워크 등 여러 기술들이 있지만 전기배터리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난 인공지능·사물인터넷 기기, 자율주행차, 전기자동차, 드론이라 해도 빨리 충전되면서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배터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불붙은 전기자동차 개발 전쟁에서 전기 배터리는 산업의 주도권을 좌우할 핵심 기술로 꼽힌다.

전기 배터리가 완성차 가격의 30~40%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인데다 짧은 주행거리, 오랜 충전 시간 등 전기자동차 보급을 가로 막는 기술적 난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개발한 ‘그래핀 볼'의 확대 이미지.

◆ 삼성, ‘그래핀 볼’ 개발··· 12분이면 “충전 끝”

전기자동차에 사용되고 있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1990년대 상용화된 제품으로 충전 효율과 지속성, 안전성 등에서 한계가 많다. 글로벌 기업들은 더 빨리 충전되면서도 더 강력하고 더 오래가는 전기배터리를 개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지난 11월27일 리튬이온 배터리 보다 충전 용량을 45% 향상시키면서 충전 속도를 5배 이상 빠르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배터리 소재인 '그래핀 볼'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흑연에서 벗겨낸 얇은 탄소 원자막인 그래핀은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흐르고 실리콘보다 140배 이상 전자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어 급속 충전에 이상적 소재로 꼽히는 물질이다.

삼성SDI와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최장욱 교수팀은 저렴한 실리카(SiO2)를 이용, 그래핀을 팝콘 모양의 3차원 입체 형태로 대량 합성하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는데 성공했다.

팝콘 형태의 그래핀 볼을 전지의 음극 소재와 양극 보호막으로 활용하면 충전 용량은 늘면서도 충전시간은 단축되고 고온 안전성까지 만족시키는 결과가 나왔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그래핀 볼’을 리튬이온 배터리의 음극과 양극에 적용하면 현재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충전 속도를 12분 수준으로 단축시킬 수 있고, 전기차용 배터리에 요구되는 온도 기준인 60도까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그래핀 볼 개발 소식은 파이낸셜타임스, CNBC, 매셔블 등 주요 외신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몇 시간 걸려 배터리를 충전해도 하루를 가지 못하는 스마트폰이나 주행거리와 충전 시간에 한계를 보이는 전기자동차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기술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테슬라와 파나소닉이 미국 네바다주 사막 위에 짓고 있는 기가팩토리. 테슬라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성능 원통형 배터리 ‘2070 전지'를 보급형 전기차인 ‘모델 3’에 장착하고 있다.

◆ 테슬라·파나소닉, “대량 생산 통한 원가 절감”

‘전기자동차의 아이콘 기업’으로 부상한 테슬라는 원래 노트북용 배터리로 쓰이던 원통형 전기배터리를 전기자동차에 채택하는 ‘발상 전환’을 통해 대세로 뜬 기업이다.

노트북용 원통형 배터리는 가격은 비싸지만 셀의 밀도를 높일 수 있어 테슬라가 만든 전기자동차는 한 때 ‘마의 주행거리’로 간주되던 200마일(320km)을 주파할 수 있었다. 원통형 전기배터리는 최근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테슬라는 최근 원통형 배터리 대량생산을 통한 단가 낮추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일본 파나소닉과 함께 미국 네바다주에 ‘기가(Giga)팩토리’를 건설 중인데 공장이 모두 완공되는 2018년부터 35GWh의 전기차 배터리셀을 생산할 계획이다. 현재 전 세계의 모든 배터리 생산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테슬라는 “기가팩토리가 완성되면 ‘모델 3’에 들어갈 배터리 생산 비용을 30% 가량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테슬라와의 동맹으로 전기차 배터리 생산 1위 기업이 된 일본의 파나소닉도 중국 다롄에 제2 공장을 짓고 있다. 이미 전기차 수십만 대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 공장을 다롄에 가지고 있지만 중국과 유럽시장 전기차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제2공장 완공 이후 배터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예정이다.

한국 기업들도 유럽 시장을 겨냥 대대적인 증설 작업을 하고 있다. 삼성SDI는 헝가리 괴드에 연간 5만대(3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LG화학은 폴란드 코비에르지체에 연간 전기차 10만대(6GWh) 공급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다.

SK이노베이션도 헝가리 북부 코마롬의 43만㎡부지에 연간 7.5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지을 예정이다. 내년 2월 착공, 2020년 초부터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도시바는 최근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 도시바 “전고체 배터리 개발”

일본의 글로벌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는 최근 2021년 미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에 전고체 배터리를 넣겠다고 선언했다.

액체·겔 형태의 기존 전해질 대신 고체 전해질을 쓰는 전고체 배터리는 차세대 전기배터리 방식으로 주목받은 기술이다. 양극재와 음극재가 고정돼 있어 합선이나 발화 위험이 적어 안전성이 높지만 액체·겔 배터리에 비해 강한 출력을 얻기 어려워 상용화의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바가 기술적인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지 관심이다.

일본 도시바는 지난 10월 3일 “6분 충전해 325㎞를 달리는 전기차 배터리를 개발했다”며 “2019년부터 양산 예정”이라고 밝혔다.

도시바가 개발한 EV용 리튬이온 배터리는 부극 재료에 티타늄과 니오븀 산화물을 사용해 체적 당 용량을 두 배로 높여 6분 만에 배터리 전체 용량의 90%를 충전할 수 있다. 이전 제품은 30분 충전으로 전체 용량의 80%를 충전할 수 있다.

10여년 전 한국, 일본, 미국의 반도체 메모리 회사들은 ‘조 단위’ 투자 계획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표하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 ‘치킨 게임’을 벌였다. 지금 패자는 사라졌고 승자는 유례없는 호황이란 ‘단맛’을 즐기고 있다.

갈수록 치킨 게임 양상으로 전개될 전기차 배터리 전쟁 결과에 따라 4차 산업혁명의 승패가 정해지고 그에 따라 국민들의 미래도 상당 부분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