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 경제의 대주주다. 일종의 차등의결권 제도까지 시행되고 있어 지분(持分)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제 경제기구나 다자간 통상협상에서 미국이 반대하는 결정이나 합의가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미국은 16.52%의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IMF가 결정하는 모든 안건은 85%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가 찬성해도 미국이 반대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미국이 사실상의 거부권을 갖고 있다. 이런 명시적 규정이 없는 경우에도 미국은 대부분의 세계 경제 현안에서 ‘수퍼 갑(甲)’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 없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반대하면 미국을 빼고라도 세계화의 흐름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대주주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 ‘반(反)세계화’ 노선에 대한 반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부활이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이 이끌었던 TPP는 트럼프의 일방적 탈퇴 결정 이후 사실상 좌초 상태였다. 그러다 최근 미국을 제외한 TPP 참가 11개국이 ‘포괄적·점진적 TPP(CPTPP)’ 추진에 합의했다. 일본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고, 2019년 협정 발효가 목표다.

유럽연합(EU)은 미국과의 ‘환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추진을 포기했다. 대신 일본과의 경제연대협정(EPA)’, 남미 메르코수르와의 자유무역협정(FTA) 마무리에 주력하고 있다. 뉴질랜드, 호주와의 자유무역 협상에도 새로 착수하기로 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짝퉁 세계화’ 움직임도 있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일본, 인도 등이 참여하고 있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그것이다. 중국이 자유무역의 수호천사를 자처하며 공(功)을 들이고 있지만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트럼프 시대가 몰고 온 반세계화 흐름이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없다. ‘미국 없는 세계화’에 동참해야 한다. 보호주의를 거부하는 세계화 진영에 가담해 힘을 보태야 한다. EU와는 이미 FTA를 체결했고, 별 의미는 없지만 RCEP에도 참여하고 있다. 남은 것은 CPTPP 가입이다.

한국은 과거 TPP 참여를 추진하다 포기했다. 2013년 7월 일본이 TPP에 합류했을 때 국내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한·미 FTA 비준으로 홍역을 치른 기억 때문에 이를 보류했다. 한·중 FTA 협상 도중에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가입해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보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관련 중국의 경제 보복에서 드러났듯이 한·중 FTA 합의문은 한낱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상식을 벗어난 중국의 폭거(暴擧)로부터 한국의 국익을 보호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2015년 한·중 FTA 타결 이후 본격적으로 TPP 가입을 추진했지만 그 때는 이미 기회의 창이 닫히고 있었다. TPP 참가 12개국이 협상을 타결지은뒤 참여국 확대 여부를 추후 결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TPP 참여를 계속 검토만 하다가 결국 포기하게 됐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TPP가 기사회생했지만 위상이 크게 약화됐다. 미국의 탈퇴로 인해 TPP 참가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7.5%에서 12.9%로 축소됐다. 참가국 확대를 통한 세(勢) 불리기가 절실한 상황이다.

미국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트럼프의 탈퇴 결정으로 TPP의 경제적 효과가 연간 4920억 달러에서 1470억 달러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분석했다. 대신 과거 TPP 참가 의사를 밝혔던 한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5개국을 포함하면 경제 효과가 486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 탈퇴로 인한 손실을 거의 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TPP 참가 결정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여당과 핵심 지지층에는 과거 한·미 FTA에 극렬 반대했던 세력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FTA와 자유무역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TPP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기대하기 힘들다. TPP에 합류하려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미적대다가는 또다시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앞으로 TPP 협상의 진전에 맞춰 진입 문턱이 점점 높아질 게 분명하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는 않겠지만 기존 참가국들의 견제를 받고, 비싼 ‘입장료’를 물게 될 가능성이 있다. 과거 한국이 TPP 참가를 추진했을 때도 그런 말이 있었다.

미국 탈퇴로 TPP 위상이 약화된 지금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정부의 통상 외교 역량에 따라 생색내며 TPP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세계화와 한국의 국익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국민과 지지층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정치적 결단과 리더십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