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집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데 달달한 커피 한잔이 생각났다. 식당 사장님께 ‘커피 있어요?’라고 묻자 출입구 옆을 가리킨다. 거기엔 ‘티타임’이라고 써진 커피 자판기가 있다.

티타임은 국내 커피머신 판매 1위 기업인 동구가 생산하는 커피자판기 브랜드다. 1989년 설립된 동구는 28년 동안 커피 머신 한길만 팠다. 이 기간 판매된 티타임 머신(machine)이 200여만대. 국내 소형 커피 자판기 시장을 90% 이상 점유하고 있다. 작년 기준 매출 280억원, 강소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엔 유럽산 고급 제품이 장악하고 있는 글로벌 원두커피 머신 시장에 출사표를 냈다. 동구 창업자인 박원찬(58) 회장은 “인구 1억명이 안되는 국내 내수 시장은 한계가 있다”며 “동남아를 시작으로 유럽 시장의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동구는 내년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에서 자체 개발한 커피 머신을 선보일 계획이다.

박원찬 동구 회장이 지난 15일 경기 성남 중원구 동구 본사에서 베누스타 로제타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 단돈 500만원 들고 창업…기술 하나로 삼성 설득

박원찬 회장이 동구를 창업한 1989년 당시 우리나라엔 커피 문화랄 게 없었다.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먹던 시절”이라고 박 회장은 회상했다. 대학교에서 토목을 전공한 박 회장은 공병부대에서 군생활을 하며 토목업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는 “밖에서 며칠을 일하다 집에 잠깐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토목 대신 선택한 일은 무역업이었다.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사직서를 낸 박 회장은 무작정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마땅한 사업 아이템을 발굴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박 회장은 “특수용접기나 자동세차기 등도 괜찮겠다 생각했는데 문제는 자본이었다. 이런 사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미국 사람들은 커피를 많이 마신다’는 것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기로 했다"고 말했다.

커피만 보고 귀국한 박 회장은 서울 마포 삼창프라자에 사무실을 냈다. 당시 박 회장의 손에 있었던 자금은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모은 500만원이 전부였다. 기나긴 ‘공돌이’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공구장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아크릴판을 자르고 붙여 커피자판기 콘셉트 모델을 발명했다. 박 회장은 콘셉트 모델을 개발하면서 자판기 관련 특허 6건을 출원했다. 이때 출원한 특허 6건이 지금의 동구가 존재하게 된 밑바탕이 됐다.

동구는 지난 9일~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카페쇼’에 참가해 자사의 프리미엄 전자동커피머신 ‘베누스타-로제타’를 선보였다.

드디어 1993년에 마이크로컴퓨터(마이컴) 방식의 전자동 커피 머신을 개발했다. 박 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영업을 뛰었다. 문을 두드리고 쫓겨나고, 두드리고 쫓겨나고, 이런 일상이 반복되던 박 회장에게 삼성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삼성의 협력사가 되기에는 동구의 여건은 너무나 부실했다.

“삼성에선 협력사를 삼기 전에 여러 지표를 평가하는데, 우리 생산공장은 기준치에 한참 미달했다. 다른 회사면 당연히 안되는 상황이었다. 평가 나온 삼성 직원은 ‘이걸 어떻게 하나’하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이면 점수 좀 높여달라며 삼성 직원에게 읍소할만도 한데, 박 회장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장이 돈이 없어서 공장이 이렇지, 직원들이 기술이 없는 건 아니다”고 큰소리를 쳤다.

삼성은 박 회장으로부터 ‘3년 내 생산 현장 개선’을 약속받고 파트너사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동구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삼성에 커피 자판기를 납품했다. 삼성의 문을 뚫자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삼성의 라이벌 가전회사인 LG는 물론, 네슬레·동서식품 등 커피 회사에 제품을 공급하게 됐다.

‘아 저 자판기.’ 동구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구가 만든 티타임 자판기는 많은 소비자가 기억하고 있다.

◆ 위기, 기회가 되다…세계로 뻗는 동구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로 중소기업인 동구도 큰 위기를 맞았다. 가장 큰 고객이었던 삼성과 LG는 2001년 커피 자판기 사업을 정리하면서 동구와의 OEM 계약을 종료했다. 박 회장은 “우리 브랜드로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위기는 기회가 됐다. 외환위기 이후 비용 절감 바람이 불면서 저렴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커피자판기는 되려 인기 상품이 됐다. 식사 후 다방에 가던 사람들이 커피를 서비스로 제공하는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단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판기를 들여놓는 식당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커피 문화가 성숙하면서 최근엔 믹스커피보다 원두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동구도 이에 맞춰 원두커피머신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커피문화가 오래된 유럽 회사가 세계 원두커피 머신 시장을 잡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스위스의 유라(Jura)와 독일의 WMF이다.

후발주자인 동구는 세계시장에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갖고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 8월 출시한 전문가급 원두커피머신 ‘베누스타-로제타’는 ‘웰메이드 제품’이라고 평가받는다. 성능은 유럽 제품과 거의 유사한데 가격은 절반 수준이다.

경기 성남 중원구 동구 공장에서 동구 직원이 생산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베누스타-로제타의 가격경쟁력이 워낙 뛰어나자 해외 브랜드들은 프리미엄급 전자동커피머신의 가격을 내렸을 정도다. 박 회장은 “2000만원을 호가하던 해외 브랜드 제품들의 가격이 1400만~1500만원대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우리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

기술도 뒤지지 않는다. 동구는 연 매출액의 20%를 기술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 최근엔 IT(정보기술)와 융합을 연구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베누스타-렘 D9’ 제품에 안드로이드 기반 OS(운영체계)를 적용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하루에 커피를 얼마나 팔았는지, 고객이 어떤 스타일의 커피를 선호하는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 고객도 블루투스 등을 통해 스마트폰과 연결해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할 수 있다. 자판기 내 원두 상태(용량·신선도)에 대한 알림 서비스부터 사물인터넷(IoT)을 통한 원두 자동 주문까지 할 수 있게 된다.

박 회장은 “IoT와 접목한 커피머신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다. 커피는 기호식품이다. 고객이 마시고 싶은 맛있는 커피 한잔을 제대로 만들어주는 것, 이왕이면 더 편리하게. 이것이 동구가 가야할 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