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1일(현지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메세 전시장 아레나홀. ‘2017 프랑크푸르트 모터쇼(IAA 2017)’ 개막을 하루 앞두고 이곳에서는 전야제인 ‘폴크스바겐그룹 나이트’가 열렸다. 세계 선두권 자동차 회사인 폴크스바겐이 신차와 콘셉트카를 전시하고 미래 전략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실내에 울려퍼지던 음악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행사장 중심으로 작은 차 한 대가 유유히 들어왔다. 일반적인 자동차와 달리 엔진룸과 보닛이 앞으로 돌출돼 있지 않고 차체는 차 바퀴를 덮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실내는 스티어링휠(운전대)조차 없었다. 좌우 개폐식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고 차에서 내린 마티아스 뮐러(Matthias Muller) 폴크스바겐그룹 회장은 이 차를 그룹의 자율주행 콘셉트카 ‘세드릭(SEDRIC·Self-driving Car)’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9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앞두고 열린 ‘폴크스바겐그룹 나이트’에서 자율주행 콘셉트카인 ‘세드릭’을 타고 등장한 마티아스 뮐러 회장. 세드릭은 폴크스바겐 자율주행 전기차 양산 모델의 기초 플랫폼이다.

뮐러 회장은 세드릭이 그럴듯한 상상력을 반영해 ‘눈요깃거리’ 정도로 내놓는 단순한 콘셉트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완전 자율주행과 동력 전기화, 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된 세드릭은 폴크스바겐이 2020년 이후 상용화할 미래차 패밀리 모델의 기초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수 전기차 투자와 양산에 대한 로드맵도 내놨다. 뮐러 회장은 “2030년까지 200억유로(약 27조원)를 투입해 폴크스바겐 브랜드가 생산하는 300개 차종에서 모두 전기차 모델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4년 디젤차의 배기가스 조작 파문, 이른바 ‘디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3년여간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왕좌에서 밀려났던 폴크스바겐이 자율주행차와 전기차 분야에서 앞선 경쟁사들에 반격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 獨, 자율주행차 개발 위해 실리콘밸리와 맞손…독자 차량공유서비스도 출범

올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는 독일 자동차 업체들의 전기차 경연장이었다. 폴크스바겐은 전기차 콘셉트카 I.D. 크로즈의 양산형 차세대 모델을 선보였고 BMW는 전기차 모델인 i3에서 진화한 뉴 i3와 뉴 i3s를 세계 최초로 전시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전기차 브랜드 EQ의 첫번째 콘셉트카인 ‘EQ A’를 전시했으며 이 모델을 기반으로 소형 전기차 양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벤츠도 전기차 개발에 100억유로(약 13조6000억원)를 집중 투입하기로 했다.

그동안 클린 디젤로 내연기관차 시대를 주도했던 독일의 자동차 업체들은 전기차 개발에서는 한 걸음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전기차 제조사인 테슬라가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의 전통 자동차 업체들이 발 빠르게 순수 전기차 시대를 대비했던 반면 독일 자동차 업체들은 ‘잘나가는’ 클린 디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4년 폴크스바겐의 디젤게이트가 터진 이후 독일 자동차 업체들의 대응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올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차 기술전쟁 시대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르면 2020년부터 상용화할 것으로 보이는 자율주행차가 주로 순수 전기차를 기반으로 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전기차 경쟁에서 밀리면 자율주행차라는 거대한 흐름에서도 도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독일차 업체들은 전기차 개발 경쟁에서는 후발주자지만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서는 이미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핵심 전장시스템 분야에서 미국 실리콘밸리의 ICT(정보통신기술) 업체들과 손을 잡았다. 내연기관차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지닌 독일차 업체들이 그동안 독자 개발 노선을 걸어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ICT와 자동차가 융합하는 미래차 산업에선 다양한 최첨단 기술 업체와의 협업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인텔과 공동으로 개발한 자율주행차의 도로주행 테스트를 진행 중인 BMW 연구원

BMW는 지난해부터 인텔과 손잡고 자율주행차 개발에 나섰다. 인텔이 올해 3월 이스라엘의 자율주행 화상인식부품 제조사인 모빌아이를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BMW-인텔-모빌아이의 ‘3각 동맹군’이 형성됐다. BMW와 인텔은 2021년부터 완전 자율주행차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차량 AI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춘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동맹에는 폴크스바겐과 벤츠가 참여했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7 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서 엔비디아는 폴크스바겐그룹에 속한 아우디를 기반으로 제작한 자율주행 콘셉트카를 시범 운행했다. 벤츠와 엔비디아는 차량용 AI 컴퓨터 솔루션인 ‘드라이브 PX 페가수스’를 탑재한 자율주행 택시를 2020년 상용화할 계획이다.

폴크스바겐은 지난해 말 카헤일링(호출형 차량공유) 브랜드인 모이아를 출범했다. 올해 베를린과 함부르크 등에서 차량 호출서비스를 시작했으며 통근형 카풀과 셔틀 서비스로 사업 분야를 확대할 예정이다. 폴크스바겐은 모이아의 2020년 카헤일링 서비스 매출 규모가 20억유로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카헤일링 시장의 선두 업체는 미국의 우버다. GM은 독자 공유서비스업체 메이븐을 세웠고 포드도 미국의 카헤일링 업체 리프트와 손잡고 관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도시, 국가 시스템과 하나로 연결된 커넥티드카를 함께 사용하는 공유서비스가 대중화하면 비싼 구입 비용과 유지비를 감수하며 자가용 차를 소유할 필요성은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

◆ 유럽, 자율주행 통합표준 ‘L3 파일럿’ 구축…”표준 선점하면 유리한 고지"

유럽연합(EU)에 속한 11개 국가는 유럽의 자율주행 통합표준을 만들기 위한 ‘L3 파일럿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폴크스바겐과 BMW, 다임러, 피아트, 르노, PSA그룹 등 유럽 자동차 업체들 외에도 도요타, 혼다, 포드 등 일본과 미국 자동차 업체들도 가세했다. 이동통신사와 손해보험사 등도 참여해 자율주행차 상용화에 필요한 ICT 커넥션과 사고발생시 책임 등에 대한 표준도 제시할 예정이다.

L3 파일럿 프로젝트에서 1000명의 운전자는 유럽 각 국의 다양한 지형지물과 도로에서 100대의 자율주행 차량을 테스트한다. 이런 과정 등을 통해 만들어지는 유럽형 자율주행차 표준은 유럽 시장에서 판매될 모든 자율주행차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L3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가들과 완성차 업체 현황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세계 각 국이 자율주행 기술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기술 표준과 법령, 윤리 등에 대한 기준을 만드는 데는 소극적이었다”며 “L3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각 분야의 표준이 정착되면 유럽이 자율주행차 상용화에서 가장 앞서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L3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한 업체들은 표준을 충족시키기까지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유럽 자율주행차 사업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앞서 지난 2015년에는 폴크스바겐과 벤츠, BMW 등 독일 자동차 3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미국의 첨단 고정밀 위치정보서비스업체인 히어(HERE)를 인수했다. 완전 자율주행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선 단순히 위치정보만 파악하는데 머물지 않고 도로 주변의 각종 표지판과 지형지물, 실시간 교통상황 등 다양한 정보를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고정밀 지도가 필요하다. 독일 자동차 3사는 공동 전선을 구축해 3차원 위치정보서비스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했다고 평가받는 히어를 인수하면서 완전 자율주행차 개발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 中, 국가 주도 ‘톱다운(top-down) 방식’ 자율주행차 개발…중심에 선 디디추싱

중국은 정부 주도로 자율주행 등 미래 자동차 기술개발에 나섰다. 정부가 로드맵을 만들고 업체들은 뒤따르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이미 국가 주도로 친환경차 의무판매를 시행해 전기차 분야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갖췄고 바이두와 텐센트 등 세계 최고 수준의 ICT 기업들도 보유하고 있다”며 “전기차, 커넥티드 시스템으로 결합될 자율주행차 분야에서도 빠른 시간 안에 미국, 유럽 등과 비슷한 경쟁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2030년 자율주행기술 로드맵’에 따르면 중국 자동차 회사들은 2020년까지 전체 신차 중 50%에 차선이탈경보, 자동 브레이크제어 시스템 등 레벨1 이상의 자율주행기능을 의무적으로 탑재해야 한다. 2025년에는 자율주행기능 적용 신차 의무 비중을 80%까지 올렸고, 2030년에는 모든 신차를 긴급 상황 외에 사람의 손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레벨3 수준의 자율주행차로 만들도록 했다.

지난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CES 아시아 2017’에서 바이두는 통신형 내비게이션 ‘바이두 맵오토’와 대화형 음성인식서비스 ‘두어 OS 오토’를 탑재한 현대차 싼타페를 전시했다.

중국 정부가 자율주행기술 의무 시행방안을 내놓으면서 완성차 업체는 물론 자율주행 플랫폼을 만드는 중국 ICT 업체들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의 최대 검색포털사이트인 바이두는 지난 4월 열린 상하이모터쇼에서 오픈소스 자율주행 플랫폼인 ‘아폴로’를 공개했다. 또 아폴로 플랫폼 개발에 15억달러(약 1조7000억원)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아폴로 프로젝트에는 중국 업체들은 물론 현대차(005380)를 포함한 중국 외 자동차 업체 70여곳과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참여했다. 바이두는 또 베이징자동차와 손잡고 2021년까지 완전 자율주행차를 양산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지난 3월 테슬라 지분 3%를 취득한 중국의 인터넷업체 텐센트는 9월에 광저우자동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관련 파트너십을 맺고 자동차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블룸버그는 지난 7일 텐센트가 자체 자율주행 플랫폼을 이미 개발해 테스트 중이라고 보도했다.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는 지난해 상하이자동차와 손잡고 자체 개발한 자동차 전용 운영체제(OS)를 적용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선보였다.

중국의 자율주행차 개발과 관련해 가장 눈에 띄는 기업은 차량공유서비스업체인 디디추싱이다. 우버, 리프트와 같은 카헤일링업체인 디디추싱은 텐센트가 투자한 디디다처와 알리바바의 자본이 투입된 콰이디다처가 20015년 합병해 탄생했다. 디디추싱은 지난해 애플로부터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투자받고 몸집을 불렸고 우버차이나까지 인수해 사실상 중국 시장을 독점하는 호출형 차량공유서비스업체로 올라섰다.

중국의 호출형 차량공유서비스 디디추싱의 애플리케이션

디디추싱은 우버, 리프트와 같이 자율주행 플랫폼 개발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난 3월 디디추싱은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자율주행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우버에서 자율주행 연구를 담당했던 찰리 밀러와 구글의 자율주행차 부문 자회사인 웨이모의 고위급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인 지아 자오인을 영입하는 등 핵심 인력 확충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폴크스바겐과 자율주행차 개발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베스트투자증권에 따르면 디디추싱의 기업가치는 500억달러~700억달러 수준이다. 카헤일링업체로 우버에 이어 세계 2위다. 기업가치가 110억달러로 평가된 미국내 2위 카헤일링업체 리프트의 약 5배 수준이다. 디디추싱은 출범 이후 1년만인 지난해 일평균 운행건수가 2000만건을 돌파했다. 우버가 2009년 설립 후 6년만에 일평균 운행건수 300만건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가공할만한 성장이다. 전문가들은 디디추싱이 자율주행차와 커넥티드카, 차량공유서비스 분야에서 중국 최대 업체로 올라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유지웅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소프트뱅크도 지난 5월 50억달러를 투자하는 등 디디추싱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잇따르고 있다”며 “폴크스바겐과의 협업과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는 중국 자율주행차 시장에서 디디추싱이 가진 잠재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