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피싱·파밍 같은 금융사기로 1000억원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피해자들이 이를 구제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행 전자금융거래법상 피해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이 피해자(금융소비자)에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전자매체가 어떻게 위조됐는지, 전자거래내역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의 정보를 알아야 하는데, 이런 데이터를 갖고 있는 금융기관이 소송에 불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이른바 ‘깜깜이 소송’인 셈이다.

이에따라 증거개시제도(원고와 피고가 미리 오픈하지 않은 증거는 법정에서 원칙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나 금융당국이 소비자에 관련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등의 개선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금융연수원과 금융연구원이 7일 공동주최한 '4차 산업혁명과 금융의 미래 그리고 금융인재 양성’ 포럼에 참석한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 전자금융거래법은 개인의 허락 없이 이뤄진 금융사기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돼있다”며 “은행들이 보안에 투자할 이유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행 전자금융거래법 9조에선 사고원인을 피해자가 기술적으로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 전문성과 정보 비대칭성 문제로 인해 소비자가 사고 원인과 손해 간 인과관계를 규명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또 접근매체 유형을 제한하고 범죄유형도 위변조로 한정했다. 첨단 사기수법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데, 법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자금융거래법은 스마트카드, 인증서, 전자서명생성정보, 생체정보만 접근매체로 열거하고 있다. 계좌번호, 계좌비밀번호, 이체비밀번호, 보안카드, 일회용비밀번호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계좌비밀번호 등이 위조돼 피해가 발생할 경우엔 구제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송창영 법무법인 세한 파트너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아직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주도로 하는 법체계가 갖춰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금융소비자 보호에 상당히 소홀한 측면이 있다”며 “모든 금융자료는 금융사가 갖고 있기 때문에 민사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소비자가 이를 입증해야 해 실무적으로 정보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주영 법무법인 한누리 대표 변호사도 “전자금융사기에 의한 피해자는 허락하지 않은 전자금융거래에서 손해를 봤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다”며 “입증책임을 전환하면 되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면 사실상 이게 잘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갖고있는 증거를 강제로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없다”며 “문서제출명령 등을 할 수 있지만, 이를 위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금융사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분쟁조정제도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엄격한 증거에 의하지 않아도 편면적 구속력을 가진 조정안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면적 구속력이란 조정 결정에 대해 투자자는 소 제기가 가능하나 금융회사가 분쟁조정의 결과를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또 증거개시제도나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하고, 금융감독당국이 금융소비자를 위해 인적, 물적 소송지원제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지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향후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시 사고 원인의 입증책임을 금융사에 부담시키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며 "다만 금융사의 무과실책임을 과도하게 높이면 이용자의 사기 공모 등이 발생할 우려도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한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