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아르헨티나에 고등훈련기 T-50 수출하는 것을 놓고 한창 협상을 하던 지난 7월.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가 KAI 마케팅 부서에 전화를 걸어, "회사가 앞으로 존속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T-50 구매를 위한 협상은 현재 중단된 상태다. 아르헨티나 대사는 검찰이 지난 7월 14일 KAI 본사 등을 전격 압수수색한 것을 보고 전화를 했다. 검찰이 지난 11일 하성용 전 사장을 구속 기소하며 수사를 끝낼 때까지 걸린 3개월간, KAI는 수출 협상이 멈췄고, 대출 거래는 끊겼으며, 주식 거래는 정지됐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지난 13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방산 수출에 크게 기여한 기업인데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방산 비리 수사 대상 1호가 됐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16일 본지 통화에서 "국산 전투기 개발에 매번 실패하다 1999년 KAI를 세워 겨우 세계적인 방산 기업으로 키웠는데, 그런 회사 전체를 방산 비리 집단으로 몰았다"며 "경영진의 개인 비리에 대해 '핀셋 수사'를 해야 했었는데,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 꼴"이라고 했다.

◇'경고등' 켜진 항공기 수출

KAI는 아르헨티나 외에 페루, 보츠와나 등에도 T-50 수출을 타진 중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런 영업 활동이 사실상 다 멈춘 상태다. T-50을 8대 더 구매하겠다고 계약한 태국도 "제대로 만들어 납품할 수 있느냐"고 KAI 측에 물었다. 인도네시아에 한국형 헬기인 수리온을 수출하려던 계획도 중단됐다.

경남 사천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 본사에서 조립 중인 고등훈련기 T-50.

외국 군 관계자들로 북적이던 경남 사천 공장은 현재 찾는 손님이 별로 없다. KAI 측은 "완성 항공기 수출과 관련된 올 상반기 매출은 1305억원인데 연말까지 크게 늘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말했다. 작년 완성 항공기 매출이 6950억원이었으므로, 올해는 5분의 1 수준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올해 말 결정되는 미국의 차기 고등훈련기(APT) 사업 수주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기존의 노후 훈련기 350대를 교체할 예정인데, 사업 규모만 총 17조원에 달한다. 종전까진 KAI-록히드마틴 컨소시엄과 보잉-사브 컨소시엄의 양강 구도로 전개됐다. 그러나 검찰 수사로 보잉이 수주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은 방산 비리 의혹을 받은 기업을 입찰 과정에서 아예 배제하는데, 경쟁사에서 이를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KAI 노조는 지난 8월 말 "KAI가 미국의 차기 고등훈련기 사업을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비리 수사에 예외가 있을 수 없지만, 항공 산업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입장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출 못 받고, 임원 급여 지급 미루고

검찰 수사가 시작된 이후 금융권 대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유동성에도 일부 문제가 생겼다. KAI는 협력업체에 현금으로 하던 대금 지급을 어음으로 바꾼 상태다. 10월 600억원 등 올해 말까지 총 2900억원의 기업어음 만기도 돌아오지만, 만기 연장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자금 확보를 위해 KAI는 만기 1년 미만으로 발행하는 전자단기채권을 2000억원 목표로 발행 중이다.

9월엔 상무보 이상의 임원 38명에 대한 급여 지급을 유보했다. 이번 달엔 임원 임금을 20%만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업무추진비는 이미 30% 삭감했다.

KAI의 시가총액은 검찰 수사 직전인 7월 13일 5조9460억원이었지만, 수사 이후 주가가 폭락해 한때 3조4847억원까지 내려갔다. 주가는 일부 회복이 됐지만, 한국거래소는 하 전 사장이 기소되자 11일부터는 주식 거래를 정지시켰다.

◇공언했던 대규모 방산 비리는 확인 안 돼

검찰은 KAI에 방산 비리가 있다며 압수수색에 수사관 100여명을 투입하는 등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압수수색 당시만 해도 검찰은 상당 기간 내사해 온 사안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실제로 12명이 기소됐고, 채용 비리 등이 드러났다. 분식회계 혐의도 현재 금융감독원의 특별감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권 차원에서 '방산 비리는 적폐'라고 강조한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검찰이 당초 자신했던 대규모 비리는 찾지 못하고 분식회계 등 경영 비리만 드러났다"면서 "비리 척결은 해야 하지만 회사 전체를 탈탈 털어 경영 위기까지 초래한 것은 과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