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팝그룹 비틀스의 고향으로 유명한 영국 리버풀은 매년 수백만명이 방문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다. 라이브 클럽이 밀집한 리버풀 중심가 매튜 스트리트는 비틀스의 숨결을 느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세계 축구 팬들은 리버풀 FC를 응원하기 위해 앤필드 로드 스타디움으로 향한다. 리버풀 박물관과 도서관, 공연장도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빈다. 도시 곳곳을 둘러봐도 불과 30년 전 리버풀이 가난과 실업을 대표하는 쇠락한 도시였다는 것을 느끼긴 어렵다. 지역사회의 참여를 바탕으로 음악·미술·공연·스포츠 등 다양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해 문화 도시로 변신한 덕분이다.

영국 서쪽 바다 아이리시해(海)의 연안 도시 리버풀은 17세기 해상무역으로 크게 성장했다. 18세기에는 카리브해 노예무역의 중심지로서 전 세계 해상무역의 40%가 리버풀을 통해 이뤄졌다. 리버풀은 산업혁명 중심지로도 역할하며 크게 번성했다. 1840년 리버풀에서 최초의 증기선이 출항했고, 신세계인 미국으로 떠나려는 유럽 이민자들이 리버풀로 밀려와 한때 시 인구가 100만명에 달했다. 타이타닉호가 건조되고 처음 출항한 곳도 리버풀항이었다.

1980년대 쇠락했던 리버풀 모습.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리버풀 경제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산업 구조가 변하며 도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집중적인 폭격을 당했다. 1981년에는 인종 차별을 불씨로 폭동까지 발생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며 빈집이 늘었고 낡은 항구 주변은 우범 지대가 됐다. 리버풀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 많은 문화 공간과 리버풀 교향악단 등 풍부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 초까지도 쇠락한 항구 도시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리버풀에서 열리는 머지사이드 페스티벌.

리버풀은 본격적인 도시 재생을 추진했다. 도시를 따라 흐르는 머지강의 이름을 딴 '머지사이드 구조계획'을 수립해 낡은 도시를 문화·상업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도시 재생의 가장 큰 전기는 '유럽 문화 수도' 프로젝트였다. 유럽연합(EU)은 회원국을 통합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럽 도시의 문화 개발을 돕는 이 프로젝트를 시행했는데, 리버풀은 '도시 속 세계(The World in One City)'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2008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됐다.

리버풀은 세계 최고의 신고전주의 건물로 손꼽히는 세인트조지홀, 영국 최초의 마천루 로열리버빌딩,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딕 아치가 있는 리버풀대성당 등 우수한 건축물과 상업항의 역사적 유산, 비틀스로 대표되는 도시 예술사를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도시 재생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리버풀은 문화 수도로 선정된 이후 오랜 준비를 거쳐 2008년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가 포함된 대규모 문화·예술 행사를 벌였다. 1만명 이상의 예술가가 행사에 참여했고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행사를 통해 발생한 경제적 효과는 약 8억파운드(약 1조2000억원)에 이른 것으로 추정됐다.

리버풀시는 문화 수도 프로젝트가 리버풀을 최고 수준의 문화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문화관광·국제협력·도시개발 등 관련 부서를 통합한 '리버풀 컬처 컴퍼니'를 설립해 운영했다. 리버풀의 도시 재생 노력은 이벤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정책 과제로도 이어졌다.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현재 리버풀은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예술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리버풀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녹슬었던 부둣가에는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박물관이 들어섰고, 많은 관광객을 수용할 깨끗한 호텔과 레스토랑, 식당이 자리 잡았다.

리버풀 시의회에 따르면 2005년 44만명이었던 인구는 지난해 48만명으로 늘었고, 리버풀 경제 상황을 나타내는 총부가가치는 2005년 71억파운드에서 2015년 109억파운드로 크게 증가했다. 경제 규모가 10년간 50% 증가한 셈이다. 리버풀은 쇠락한 과거에 멈춰있지 않고 미래를 향하는 역동적인 도시가 됐다.

지금도 리버풀의 도시재생 사업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오래된 도시 유산을 정비하고 여기에 리버풀만의 스토리를 입혀 도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시 정부가 프로젝트 초기 작업을 주도했다면 지금은 기업과 지역사회 등 민간이 주도한다는 점이 다르다. 시 정부는 민간 투자를 유치해 시장 중심의 도시 정비가 이뤄지도록 돕고 있다.

리버풀 공사 현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한 '어셈블(Assemble)'이 수행한 '그랜비 4 거리(Granby Four Streets)' 프로젝트다. 리버풀시는 그랜비 지역을 재개발하며 비콘스필드·케언스·저민·듀시 등 4개 거리를 제외하고 다른 구역을 모두 철거했다.

이후 지역 주민들은 이 거리를 살리기 위해 2011년 '그랜비 4 거리 공공토지신탁(Granby Four Streets Community Land Trust)'을 설립하고 어셈블에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어셈블은 지역 주민의 생활을 고려해 재건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리버풀시는 문화 도시를 운영하는 데 6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지속 가능, 평등, 사회적 포용, 시민 참여, 지역사회 연관, 최고의 가치 등이다. 우선 리버풀시는 모든 정책을 수립하고 운영할 때 지속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문화 도시 육성 과정에서 여러 분야의 지역 전문가를 초빙해 의견을 듣는 동시에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도록 한 것이다. 리버풀시는 또 흑인과 소수민족,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 정책을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했다. 실업, 범죄, 건강, 교육, 주택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고위험 직군에 있는 근로자 수를 줄이고 이들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는가 하면 일자리와 거주지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시민과 지역사회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최고의 문화 중심 도시를 만드는 데 가치를 부여했다. 시 정부의 독단적인 결정을 지양하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정책 주도권을 시민과 나눴다.

시 정부가 강조한 운영 원칙은 리버풀이 성공적으로 재건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리버풀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시의 보건·복지 수준도 크게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