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제프리 C 홀, 마이클 로스배시, 마이클 영 등 미국 과학자 3명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밤낮에 따라 인체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생체 주기를 유전자 차원에서 밝힌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노벨 의학상 발표 직후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지에는 "또다시 노벨상이 초파리에게 주어졌다"는 기사가 잇따라 실렸다. 로스배시 미 브랜다이스대 교수도 수상 소식을 듣고 "초파리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노벨상과 초파리는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초파리는 몸길이가 수㎜에 불과하다. 국내에서는 식초가 든 음식에 잘 꼬인다고 초파리라고 하지만 서구에서는 바나나 같은 과일을 좋아한다고 과일파리(fruit fly)라고 부른다. 올해 노벨 의학상 수상자들은 올빼미형 인간도 아니고 아침형 인간도 아닌 바로 이 작은 초파리를 통해 생체 시계의 비밀을 밝힌 것이다. 초파리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경우는 이번까지 모두 여섯 번이다. 1933년 미국의 토머스 헌트 모건을 시작으로 1946년과 1995년, 2004년, 2011년에도 초파리 연구에 노벨 의학상이 돌아갔다.

◇초파리, 인간과 질병 유전자 75% 공유

과학자들이 초파리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DNA에 있다. 초파리는 인간과 DNA가 60% 일치한다. 특히 인간의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중 75%가 초파리에게서도 발견된다. 유전병인 다운 증후군에서 알츠하이머 치매, 자폐증, 당뇨병과 각종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이 초파리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1794년 '파리(The fly)'란 시에서 '나는 너 같은/ 파리가 아니냐?/ 아니, 네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냐?'라고 읊었다. DNA로 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그렇다'인 셈이다.

게다가 초파리는 2주도 안 돼 한 세대가 바뀐다. 돌연변이도 잘 일어난다. 염색체도 4쌍에 불과하다. 사람은 23쌍이다. 암수 구별도 쉽다. 사람 대신 유전자 연구를 하기에 최적화된 실험 동물인 셈이다.

초파리가 과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기 초다. 미국 식품 유통 회사 치키타는 1870년 자메이카에서 구매한 바나나를 처음으로 미국 뉴저지에 가져와 판매했다. 바나나와 함께 초파리도 미국으로 유입됐다. 곧 모건 교수가 있는 뉴욕 컬럼비아대에서도 초파리를 흔하게 볼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은 빈 우유병에 바나나를 넣고 실험용 초파리를 키웠다.

1907년 컬럼비아대의 한 실험실에서 모건 교수와 제자들은 초파리 중에 붉은색 눈이 흰색으로 변한 돌연변이를 발견했다. 모건 교수는 돌연변이 초파리와 정상 초파리를 다시 교배하는 실험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유전자가 염색체에 있음을 알아냈다. 그와 함께 현대 유전학도 탄생했다.

◇암세포 증식, 자폐증 원인도 규명

두 번째 초파리 노벨상도 모건 교수의 실험실에서 나왔다. 모건 교수의 제자인 허먼 조셉 멀러 박사는 X선으로 초파리의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음을 밝혀 1946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후 배아 발생과 후각 기능, 면역반응, 그리고 이번 생체 주기까지 생명체의 근본적 비밀을 밝힌 연구가 초파리 노벨상의 명예를 이어갔다.

노벨상을 낳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초파리 연구가 한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세금 낭비의 대표적 예로 지목된 적이 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는 "공공의 이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초파리 연구 같은 프로젝트에 달러가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페일린 주지사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초파리 연구는 기초과학은 물론, 환자 치료에도 기여했다. 아직 노벨상을 받지 않았지만 암세포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이유도 초파리 연구에서 밝혀졌다. 세포는 나이가 들면 스스로 사멸한다. 하지만 암세포는 이런 사멸 기능이 차단돼 무한정 증식한다. 과학자들은 초파리에서 세포 사멸을 억제하는 단백질을 찾아냈다. 이후 이 단백질을 공격하는 암치료법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자폐증을 유발하는 화학물질도 초파리에게서 처음 발견됐다.

◇노벨 의학상 89%가 실험 동물 희생 덕분

노벨상과 인연을 맺은 동물은 초파리 외에도 많다. 1901년 첫 노벨 의학상을 받은 독일의 에밀 폰 베링 박사는 디프테리아를 예방하는 항독소 혈청을 소와 기니피그·말·토끼·쥐 등에게 실험했다. 노벨 의학상은 그 후 지금까지 106회 수여됐는데, 그중 89%인 94회가 동물실험 연구에 주어졌다. 식물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경우는 옥수수 유전자 연구로 1983년 수상한 매클린톡 박사가 유일하다.

하지만 최근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노벨상의 미래도 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침팬지 같은 유인원을 이용한 실험이 금지됐다. 미국의 영장류 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2008년 동물실험 없이 의학 지식의 발전을 이룬 성과에 노벨상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인간 세포로 미니 장기(臟器)를 만들어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플라스틱 칩 위에 특정 세포로 장기와 같은 미니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노벨상 수상의 공을 바이오 칩에 돌릴 날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