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는 현재 전자투표를 미도입했으나 이용을 검토 중에 있으며, 그 밖에도 당사 주주 총회에 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해, 주주총회일 집중에 따른 문제 등을 해결하고 주주 의결권 행사가 더욱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유한양행(000100)

“당사는 업무의 효율성, 신속성을 위해 의장과 대표이사 분리를 하지 않고 있으나, 이사회 독립성 및 감독기능 강화를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별도의 집행임원제도는 도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 신영와코루(005800)

29일 거래소 전자공시시스템(KIND)에는 이 같은 내용의 공시가 연이어 올라왔다. 상장사가 투명한 지배구조와 주주 권익을 위해 제대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기업 지배구조 모범규준 공시제도’가 처음 시행된 데 따른 것이다. 제출 마감 기한인 이날, 공시 대상인 코스피 상장사 가운데 총 75개 기업이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를 공시했다.

코스피 상장사들은 한국거래소가 제시한 핵심원칙 10개 항목을 준수했는지 여부에 답을 하고, 만약 준수하지 못한 항목이 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준수 또는 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생소한 방식으로 민감한 사안을 공개해야 한다는 점에 기업들이 부담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제도의 수위를 낮췄지만, 예상보다 많은 수의 기업이 공시에 참여했다는 평가다.

◆ 전자투표제·사외이사 외부평가·차등배당 등 소홀한 기업 수두룩

첫 기업 지배구조 모범규준 공시에 참여한 기업은 금융투자회사가 44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금융사들은 현행 규정에 따라 기존부터 금융위원회에 정기적으로 지배구조 관련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을 공시 형태로 전환한 것이기 때문에 타 업권 대비 부담이 적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미준수 사항이 가장 많았던 부분은 ‘주주의 공평한 대우’가 이뤄졌는지를 따져보는 항목이었다. ‘주주는 보유주식의 종류 및 수에 따라 공평한 의결권을 부여받아야 하고, 주주에게 기업정보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공평한 의결권을 위한 수단으로 꼽히는 전자투표를 대부분의 기업들이 도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향후 전자투표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현대제철(004020), 대경기계기술등은 실효성이 떨어져 전자투표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을 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주주 배당률을 소액주주보다 낮게 책정하는 차등배당을 실시하지 않고 있는 기업들은 주주제안 등을 통해 주주들의 요구가 있는 경우 적극적으로 이를 반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준수 사항 중에는 사외이사를 대상으로 외부평가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도 많았다. 공시 항목 가운데는 ‘사외이사의 적극적인 직무수행을 유도하기 위하여 이들의 활동내용은 공정하게 평가돼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보수지급 및 재선임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이행하는 기업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 공시 항목

◆ 기업 지배구조 모범규준 공시한 기업, 외국인 투자 증가 기대

기업 지배구조 모범규준 공시가 본격 이뤄지면서 그동안 투명하지 못한 지배구조 탓에 투자를 꺼려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를 바꿔놓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 정보가 장막 뒤에 가려져 있다는 외국인들의 인식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소 중 하나로 오랜 기간 지목돼왔기 때문이다.

영국, 미국, 호주, 독일, 일본 등 해외 주요 거래소들은 기업 지배구조를 투명화하고 주주 권익을 확대하기 위해 우리나라보다 강도가 높은 지배구조 공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기업 정보가 적고 오너 중심의 폐쇄적인 경영 구조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 상장사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투자를 결정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영국의 경우 1990년대 초반 주가조작 등 기업 비리가 사회문제가 되자 사외이사의 역할 등을 강조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을 제정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상장회사들이 이 규준을 준수하거나 또는 준수하지 못한 이유를 담은 공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의무로 정해 제도의 강도가 높다는 점이다.

호주는 호주증권거래소(ASX) 산하 기구에서 제정한 기업지배구조 공시규정을 기업들이 준수하지 않을 경우, 이유를 기술하도록 하는 제도를 실시 중이다. 독일도 준수 또는 설명 원칙이 있으며, 미국의 경우도 사베인즈-옥슬리(Sabanes-Oxley)법에 내부자거래, 기업윤리기준에 관한 정보를 기업 홈페이지에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8월 금융청이 ‘신성장전략’의 일환으로 상장사들이 매년 ‘준수 또는 설명’ 방식으로 기업지배구조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제도가 시행된 지 불과 2년여 만에 90% 이상의 기업이 모범규준을 ‘준수’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와 함께 2014년 6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는데 한국거래소의 조사에 따르면 이후 일본 내 상호출자 기업 비율이 감소하고 사외이사 선임비율이 증가하는 효과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현금배당 역시 꾸준히 증가했고, 자기자본이익률(ROE)도 늘어나는 결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