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라 해도 럭셔리카 시장엔 고정된 수요가 존재한다. 막강 구매력으로 무장한 ‘0.1%의 초소득층’ 수요 덕분에 럭셔리카는 ‘불황 무풍지대'로 불린다. 불황기에 서민들은 생필품 외에는 주머니를 열지 않지만 초고소득층에선 호황기와 마찬가지로 신분과시형 소비가 유지된다.

고가 차량인 수입차 통계를 보면 이런 경향은 명확하다. 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7월까지 1억원이 넘는 수입차는 9730대 팔렸다. 불과 7개월 만에 지난해 1억원 이상 전체 판매량(1만2238대)의 79.3%가 팔린 셈이다. 1억원 이상 차량의 수입차시장 점유율도 올해 7월까지 7.2%로 지난해 5.4%보다 1.8%포인트 상승했다.

세계 3대 명차로 꼽히는 롤스로이스 판매량은 올들어 7월까지 지난해 연간 실적에 육박했고, 수퍼카 람보르기니 판매량은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을 넘어섰다. 벤틀리, 마세라티 등 다른 럭셔리카의 올해 판매량도 지난해 실적을 추월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수입차 업계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수입차가 대중화되면서 더 고급스럽고 차별화된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중시해 물건의 가격이 비싸질수록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인 ‘베블런효과(Veblen effect)’가 수입차 시장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전에는 세단이나 스포츠카 위주였던 럭셔리카 브랜드들이 수년전부터 실용성이 좋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내놓고 외연 확장에 나선 것도 판매량 증가에 한몫했다.

◆ 롤스로이스·벤틀리·람보르기니 판매량 급증세...역대 최대 판매 잇따라

롤스로이스는 올해 들어 7월까지 52대를 판매해 지난해 연간 판매량(53대)에 육박했다. 평균 4억원이 넘는 차량 가격에도 불구하고 월평균 7대가 팔려나갔다. 올해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차량은 기본 가격이 4억2000만원에 이르는 ‘고스트(Ghost)’로 16대가 등록됐다.

롤스로이스 고스트 서울.

롤스로이스는 한국시장에서 호조를 보이자 지난 5월 롤스로이스 113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위해 특별 제작된 ‘롤스로이스 코리안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롤스로이스 모터카 관계자는 “기존 서울 전시장 외 부산 전시장이 추가되며 판매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폴크스바겐그룹의 럭셔리카 벤틀리도 같은 기간 133대를 판매해 연말까지 지난해 판매량(170대)을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벤틀리는 지난해 8월 폴크스바겐 디젤게이트 여파로 국내서 ‘뮬산’을 제외한 전 차종의 판매정지 처분이 내려져 개점휴업 상태로 있다가 5월부터 판매를 재개했다. 판매를 재개한 5월 한 달 동안만 대기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74대가 팔리기도 했다.

벤틀리 벤테이가.

벤틀리는 현재 플라잉 스퍼 V8, 컨티넨탈 GT V8, 컨티넨탈 GT V8 컨버터블 등의 판매를 재개했고, 지난 3월 신규인증을 받은 SUV 차량 벤테이가 판매도 시작했다.

이탈리아 고급차 브랜드 마세라티도 7월까지 누적 판매량이 1150여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약 680대)과 비교해 70% 가까이 성장했다. 이탈리아 수퍼카 브랜드 람보르기니는 올들어 국내 시장에서 22대를 판매해 지난해 연간 판매량(20대)을 돌파했다.

람보르기니 우라칸 스파이더.

◆ SUV와 엔트리급 차량 출시로 외연 확장

럭셔리카 브랜드들은 더는 세단이나 스포츠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람보르기니 등은 수년 전부터 SUV 개발을 시작했고 '브랜드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럭셔리 SUV 신차들이 차례로 공개되고 있다.

벤틀리는 올해 한국시장에 대당 3억원이 넘는 초고가 SUV `벤테이가`를 출시해 석달만에 48대를 판매했다. 마세라티도 첫 SUV모델인 `르반떼`를 올해에만 450대 이상 판매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롤스로이스는 BMW 대형 SUV `X7`을 기반으로 하는 `컬리넌`을 올해내 공개할 예정이다.

마세라티 '르반떼'.

람보르기니도 내년 상반기 중 양산을 목표로 콘셉트카 `우루스` 양산형 모델을 준비 중이다. 영국 고급 스포츠카 브랜드인 애스턴 마틴도 과거의 대형차 브랜드인 라곤다를 부활시켜 SUV 시장에 뛰어든다는 계획이다.

럭셔리카 브랜드들이 SUV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SUV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글로벌경영연구소에 따르면 SUV 글로벌 판매 비중은 2012년 16.7%에서 2015년 24.7%, 2016년 24.6%로 증가했다.

독일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쉐가 첫 SUV 모델인 ‘카이엔’을 성공시킨 것도 영향을 미쳤다. 카이엔은 1990년대 심각한 재정난을 경험한 포르쉐가 외연 확대를 위해 승부수를 던진 모델이다. 포르쉐는 SUV 생산이 브랜드 이미지를 추락시킬 것이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2년 카이엔을 출시했다. 현재 카이엔은 포르쉐 전체 판매량의 3분의 1을 책임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T 테일러 메이드 차량

가격 문턱을 낮춘 럭셔리카의 엔트리카(고객이 처음 구매하는 차) 출시도 이어지고 있다. 마세라티는 2013년 1억원 미만 차종인 기블리를 내놨다. 페라리도 입문용 페라리로 불리는 캘리포니아T를 통해 외연 확대를 노리고 있다. 캘리포니아T는 가격을 2억원 후반대로 대폭 낮췄고 도심에서도 불편함 없이 주행이 가능한 차다.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남과 다른 차를 타고 싶어하는 부유층이나 20~30대 젊은 직장인들이 럭셔리 SUV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려는 트렌드가 늘고 있다”면서 “특히 최근 리스나 할부 등 금융상품의 발전을 통해 고객 입장에서 월 비용의 부담이 줄어든 것도 럭셔리카 호황에 한몫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