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글로벌 물동량 확대에 기여한 컨테이너 박스의 위력을 눈치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만약에 그것이 없었다면, 아무리 기차와 선박이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실제로 화물이 처리되는 속도는 지금보다 현저히 줄었을 것이다. 운전기사나 인부가 항구에서 물건을 일일이 싣고 나르고 앞의 화물이 처리되는 동안 대기하는 시간이 병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의 수천 년 상거래 역사에서 좀처럼 제거하기 힘든 현실적 제약이었다. 리카도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은 대개 운송 비용이 0이라고 가정하고 무역 현상을 분석했지만 비현실적인 가정에 불과했다.

저자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세계화의 공신은 바로 내륙과 해상 연계 지점에서 발생하는 운송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킨 컨테이너 박스였다. 하지만 1956년 첫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항에서 컨테이너를 적재한 유조선이 처음 출항한 이후 세상을 변모시킨 힘에 비해 경제학자나 역사가들로부터 이상하리만치 외면당해 왔다는 사실에 저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기의 혁신을 주도한 인물은 해운업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트럭 운송 사업가 맬컴 매클레인(Malcolm P. McLean, 1913~2001)이었다.

매클레인의 시랜드서비스는 1975년에 한진그룹과 합작해서 한진해운을 설립하기도 했다. 뉴스위크 기자이자 저널 오브 커머스 편집장 출신의 이코노미스트 마크 레빈슨(Marc Levinson)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집요하게 파고든 저서 '더 박스'를 내놓았다. 이 책은 컨테이너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혁신의 본질을 여러 측면에서 일깨운다.

첫째, 위대한 혁신은 과학기술이나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한 발상 전환만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역을 위해 하염없이 대기하는 운전기사와 부두노동자의 비효율을 제거한 것은 첨단 과학 이론이 아니라 투박한 모습의 철제 상자였다.

둘째, 한 사람의 천재가 전례 없이 들고 나오는 혁신은 없다. 매클레인이 탠틀링거와 같은 탁월한 엔지니어와 협력하여 세세한 제작과 운영 방식을 구체화시키기는 했지만, 이미 유사한 방식이 이전부터 운송업계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됐다.

셋째, 혁신이 세상에 확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초기 매클레인의 발상은 업계에서 우스꽝스러운 편법으로 치부당하기도 했다. 거부감 극복은 물론이고, 박스 규격 표준화, 신개념의 컨테이너 전용선 설계, 그리고 항만 크레인과 이를 가동할 전산 시스템의 개발 등 배경 인프라가 갖추어지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넷째, 모든 혁신은 기존 관행을 파괴한다. 특히 직업 세계에 대해서 그렇다. 부두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가 줄어들 우려로 크게 반발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내륙의 기차와 트럭 종사자들도 일하는 방식을 종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빅데이터나 IoT 혁신에 온통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요즘, 가까운 현장 곳곳에 눈치채기 힘든 혁신의 계기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