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도림동에 사는 주부 김모(62)씨는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노란색 포장지에 싸인 PB(Private Brand·자체 브랜드) 상품을 먼저 찾는다. 김씨는 "가격은 싸고 양도 많은 데다 대형 마트가 기획한 상품이어서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소비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PB 상품 시장은 해마다 큰 폭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 마트 3사의 PB 매출은 2008년 3조원대에서 2013년 5조원대로 늘었다. 요즘에는 편의점에서도 PB 상품이 보편화면서 GS25, 세븐일레븐. CU 3사의 매출에서 PB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5% 미만에서 2013년 28.8%로 껑충 뛰었다.

PB 상품은 대형 유통업체들의 매출 증대뿐 아니라 '상생'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마트는 지난 5월 자사 PB인 '노브랜드' 상품 중 중소기업의 비중을 70% 이상으로 올리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에 따르면 PB 상품 시장 성장에 따른 과실은 유통업체가 독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주는 납품업체가 부리고, 돈은 유통업체가 버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PB 제품 납품할수록 제조사 이익은 감소

이진국 KDI 연구위원이 16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PB 상품 매출 증가는 유통업체에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추정 결과 PB 매출 비중이 1%포인트 오를 때마다 점포당 연간 매출은 2230만~2850만원, 연간 유통 이익은 270만~900만원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PB 상품의 매출이 증가할수록 납품 제조업체의 매출은 오히려 감소했다. 특히 제조업체의 규모가 클수록 매출 감소 폭이 커서 PB 매출 비중이 1%포인트 오를 때 대기업은 10억9000만원, 중소기업 중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기업은 2억8000만원씩 각각 매출액이 감소했다. 규모가 큰 제조업체일수록 소비자에게 잘 알려진 고유 브랜드(NB)를 가진 경우가 많은데, PB 상품 납품이 늘어나면 고유 브랜드 판매가 줄어드는 제 살 깎아 먹기(cannibalization)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추정했다.

영세한 규모의 소상공인 회사는 PB 상품 납품으로 약간의 매출 증가가 발생하지만 이조차 영업이익 증가로는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고·마케팅·물류비 등 생산 비용 절감으로 발생한 이익을 대부분 유통업체가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은 "불공정한 이익 배분 구조 때문에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이 PB 납품으로 생산 규모가 확대되더라도 경제적 실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납품업체 10곳 중 1곳 "불공정 거래 경험"

이 보고서는 유통업체에 PB 상품을 납품하는 크고 작은 1000개 제조업체를 설문조사해 작성됐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통업체들이 내놓는 기획 상품 대부분이 제조업체 브랜드 제품을 그대로 베끼거나 약간 바꾼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유통업체에 PB 상품으로 납품했다는 응답은 13.3%에 불과했고, 고유 브랜드 제품의 특성을 약간 변형해 납품했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포장만 바꿨다는 응답도 26%나 됐다.

유통업체의 '갑질'을 경험한 경우도 많았다. 설문에 응답한 제조업체 10곳 중 1곳이 납품 단가 인하 요구, 포장 변경 비용 전가, 판촉 행사 비용 부담 등 유통업체의 불공정 거래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 연구원은 "PB 시장 성장의 확대가 유통업체에만 집중되고 하도급 제조업체로의 낙수 효과는 미미한 경향이 뚜렷하다"며 "PB업계의 공정 시장 질서 확립을 위한 감시 활동을 강화하고, 중소 제조업체들의 해외 PB 시장 진출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