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개발한 3세대 원전 APR1400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한 건 국내 원전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내년 NRC 심사를 완전히 통과하면 미국 등 해외시장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제기됐던 원전 안전에 대한 우려를 상당 부분 불식시킬 수 있다는 게 원전 관계자들의 기대다.

한국이 UAE에 짓고 있는 바라카 원전 공사 현장. 내년 초 1호기를 시작으로 차례로 나머지 3기가 준공될 예정이다. 이 원전에는 한국이 자체 개발한 3세대 원자로 APR 1400이 들어간다.

중대 사고 가능성 10배 낮춰

원자로는 안전성과 경제성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한다. 1세대 원전은 1950~ 1960년대 지어진 것으로 연구실 실험용 성격이 컸다. 2세대 원전은 1970~1990년대 보급된 본격 상업용 원자로다. 3세대 원전은 러시아 체르노빌,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를 겪은 이후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기존 원전에 비해 안전성을 대폭 강화한 점이 특징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10년간 2350억원을 들여 2002년에 3세대 원전 개발을 완료했다. 한국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층 더 안전성을 강화해 NRC의 심사를 받고 있다. NRC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자연재해 대비 등 안전성 심사를 대폭 강화했다. APR1400은 후쿠시마 원전 때 발생했던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다중의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쓰나미와 지진 때문에 냉각장치가 장기간 작동하지 않아 멜트다운(노심 용융)이 발생, 방사성 물질이 대량 유출됐다. APR1400은 단전 및 냉각 장치 파손 시에도 작동할 수 있는 별도의 비상 냉각장치를 갖추고 있다. APR1400은 기존 원전과 달리 원자로 격납 건물을 4개 공간으로 구분돼 있는 보조 건물이 감싸고 있다. 각각의 공간에는 안전 보조 설비가 설치돼 있다. 하나의 공간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다른 공간 안에 있는 설비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4중의 안전관리 장치를 갖춘 셈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노심에서 유출된 수소로 인한 폭발 사고가 있었던 점을 감안, 전원 없이 가동이 가능한 수소 제거 설비도 설치했다. 강화된 내진 설계와 다중 안전장치로 노심(爐心)이 녹아내리는 등 중대 사고가 발생할 확률을 기존 1만분의 1에서 10만분의 1로 낮췄다.

한국, 3세대 원전 시장 선두권

3세대 원전 시장은 기존 원전 강국인 미국·프랑스가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한국이 APR1400으로 원전시장 판도를 바꾸고 있다. 미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모델도 미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현재 미국과 중국에서 8기를 짓고 있지만 완공된 게 없다. 특히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짓고 있는 서머 2·3호기는 공기 지연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하다 최근 공사를 중단했다. 공기 지연으로 건설비가 급증, 웨스팅하우스를 사실상 파산으로 내몰았다.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GE·히타치 합작사가 만든 3세대 원전 'ESBWR'이 2014년 NRC의 설계 인증을 받았지만 이 모델은 기본 구조가 사고가 난 후쿠시마 원전과 같은 방식이어서 발주가 끊겼기 때문에 APR1400과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일본도 3세대 원전에 대해 미 NRC 설계 인증 신청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아레바는 심사를 중단했고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은 10년 넘게 2단계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다. 아레바는 더욱이 해외 원전 건설 프로젝트에서 차질을 빚으면서 신뢰도가 떨어지고 지난해까지 6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재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원전 업체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해외시장 진출이 주춤한 상태이다.

3세대 원전 가운데 본격적인 상업 운전에 들어간 것은 APR1400이 유일한 상황이다. 국가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도 3세대 원전을 개발했지만, NRC 설계 인증과 같은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안전성 평가를 받지 못했다. 원전 업계에서는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이 해외 수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김창섭 가천대 교수는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시행해도 원전 수출을 막지 않겠다고 하지만, 수입국 입장에서 보면 한국 내에서도 외면받는 원전을 수입하겠다고 결정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