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통신사, 단말기 제조업체의 경쟁을 촉진시키면 가계 통신비는 줄어든다. 이를 위해 '고비용 저효율'의 휴대전화 유통 시장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선비즈는 단말기 판매와 통신 서비스 판매를 분리하는 '자급제 시대 준비하자'를 시리즈를 통해 통신 유통 구조의 개선책과 자급제 연착륙 방안을 두루 모색한다. [편집자주]

2007년 1월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뒤흔든 애플의 아이폰이 공개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이폰을 구경할 수 없었다. 삼성전자와 이동통신사가 반대해 아이폰의 국내 출시를 막았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 28일 KT(030200)가 삼성전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가량 뒤늦게 아이폰을 국내에 출시했다. 당시 제품은 아이폰의 3번째 모델인 ‘아이폰3GS’였다. 이때부터 KT와 삼성전자의 갈등이 시작됐다. 당시 삼성전자(005930)는 신문 광고를 통해 아이폰 출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삼성은 스마트폰 ‘옴니아 시리즈’를 이통사별로 소개하면서 SK텔레콤은 ‘T옴니아2’로 LG유플러스는 ‘오즈옴니아’라는 이름으로 각각 표기한 반면, 유독 KT 제품만 이름 대신 ‘SPH-M8400’이라는 모델명으로 표기했다.

이를 두고, 당시 이석채 KT 전 회장이 “KT 제품에는 ‘쇼옴니아'라는 이름은 없고 모델명만 적혀있다”며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르지 못하고 서얼인 홍길동이 됐다”고 말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기억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이 아이폰 구매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출시가 3년씩이나 지연된 것은 소비자가 직접 휴대전화를 살 수 없고 이통사 대리점을 통해서만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 있는 한국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자급제가 일반화 된 미국이나 유럽 등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급제는 소비자가 이통사를 통하지 않고 대형 마트나 쇼핑몰에서 직접 스마트폰을 마련(구매)하는 제도를 말한다.

2010년 11월 28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아이폰3GS’ 개통을 위해 가입자들이 줄을 선 모습.

◆ 왜 이통사는 아이폰 유통을 막았나

휴대전화를 판매하는 삼성전자는 경쟁 제품인 아이폰 유통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통사들이 나서서 아이폰 출시를 막았을까.

당시, 이통사는 아이폰에 탑재된 와이파이 기능과 애플이 자체 앱스토어를 통해 콘텐츠를 판매하는 점을 경계해 아이폰의 국내 출시를 서두르지 않았다. 당시 국내 제조사가 만든 휴대전화에는 와이파이 기능이 탑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 데이터 사용료를 이통사가 챙길수 있었지만 아이폰이 출시되면 그만큼의 수익이 감소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원 등 콘텐츠를 판매할 경우, 이통사가 일종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는데, 아이폰의 경우 아이튠즈와 같은 자체 앱을 통해 직접 애플이 콘텐츠를 유통하는 구조라 이통사 입장에서는 아이폰의 국내 유통이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뒤늦게 아이폰 유통에 나선 KT의 속내는 아이폰 출시를 통해 고가 요금제 가입자를 쉽게 유치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폰 구매를 희망하는 타사 가입자의 번호이동을 유인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휴대전화 와이파이 기능 탑재는 막을 수 없는 세계적 트렌드라는 점도 고려됐다.

이통사 한 관계자는 “당시 아이폰은 100만원대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었기 때문에 단말기 구매를 위해 가입자들은 KT의 고가 요금제에 가입해 보조금을 지원받아야 했다”며 “KT가 아이폰을 유통시킨 것은 자사의 이익에 철저히 부합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DB

◆ 한국이 외산폰의 무덤인 진짜 이유 …"소비자 선택권 제약한 이통사와 제조사"

2012년부터 국내 이통사에 등록된 단말기만 유통할수 있도록 규제한 제도인 ‘화이트리스트’ 방식이 폐지되면서 단말기 자급제가 시작됐다. 해외에서 구매한 외산폰도 국내에서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자급제만 도입되면 샤오미, 화웨이 등 30만원대 미만의 외산폰 판매가 국내에서 확산되고, 이통사로부터 고가의 프리미엄폰을 구매할 때 받았던 보조금을 선택하지 않는 가입자가 증가하게 되면서 이통사는 보조금 경쟁을 포기하고, 통신요금 인하 경쟁으로 방향을 선회할 것으로 예상했다. 삼성전자 등 국내 휴대전화 제조사들도 국내 소비자들이 외산폰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말기 출고가를 낮춰 가계 통신비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자급제가 시행됐지만 기대했던 경쟁 효과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2012년 이후 HTC, 화웨이, 샤오미, 소니, 레노버, 블랙베리 등 해외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국내 스마트폰 시장 문을 두드렸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현재까지도 스마트폰 국내 점유율 1%를 넘긴 해외 브랜드는 애플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전히 한국은 ‘외산폰의 무덤’인 이유는 단말기 유통 장악력을 놓지 않으려는 이통사가 소비자들이 직접 단말을 구매할 경우,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때 이통사에 국제단말기인증번호(IMEI) 정보가 등록돼 있지 않으면 롱텀에볼루션(LTE) 서비스가 지원되지 않았고 3세대(G) 통신 서비스만 이용 가능했다.

IMEI 정보 등록 없이는 장문의 메시지(MMS) 이용도 불가능했다. 해외에서 어렵게 스마트폰을 구해도 이용자가 직접 전파인증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결국 가입자들은 번거러움 때문에 외산폰 구매를 포기하고, 이통사를 통해 국산 단말을 구매하게 됐다. 외산폰에 대한 사후관리(AS) 문제도 한몫했다. 액정이 깨지거나 부품이 파손될 경우, 수리를 받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산폰으로 수요가 집중됐다.

2016년 하반기 국내에 출시된 주요 외국 브랜드 스마트폰

물론 국내 제조사들이 내놓은 중저가 제품들도 외산폰의 국내 확산을 막는데 일조했다. 프리미엄 제품에 집중하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2013년 이후, 중저가 라인업을 대거 출시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J 시리즈와 갤럭시A 시리즈를 출시했고, LG전자는 K시리즈와 X시리즈를 출시했다. 국내 양대 제조사가 중저가 라인업 제품을 출시하자, 중저가폰 시장을 노린 외산폰의 국내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윤문용 녹색소비자연대 국장은 “2012년부터 자급제를 시작했지만 중저가 외산폰들은 이통사와 제조사의 이해관계에 배치된다”며 “결과적으로 이통사가 단말 유통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자급제 성공은 한계가 있었고 국내에서의 단말기 출고가가 해외에서보다 비싼 이유기도 하다”고 말했다.

신현두 한국소비자협회 대표는 “명목상으로는 자급제를 실시한다고 했지만 ‘무늬만 자급제' 형태로 실시된 점도 한국이 외산폰의 무덤이 된 진짜 이유라는 지적이 많다”며 “지금이라도 제조사와 이통사가 쥐고 있는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