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으로 20~30초간 만들어지는 단기 기억과 달리 대체로 기억하는 몇 분 전 상황이나 몇 십 년 전의 일들은 모두 장기 기억이다. 장기 기억은 매 순간 쌓이고 추억으로 자리잡아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뇌의 해마 부위에서 담당하는 장기 기억은 수면과 상관관계가 있다. 학습 후 잠을 자는 동안 학습 기억이 강화되는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동안 숙면을 돕는 ‘수면방추파’라는 뇌파가 이런 장기 기억 형성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면방추파와 장기 기억간의 명확한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의 신희섭 단장과 샤를 프랑소와 랏츄만 박사(사진) 연구팀은 수면방추파와 다른 뇌파와의 인과관계를 밝히고 수면방추파를 조절하면 수면 중 학습 기억력을 2배 가까이 높이는 실험에 성공하고 국제 학술지 '뉴런'에 6일(현지시간) 발표했다.

IBS 연구진은 수면방추파 외에 대뇌피질의 ‘서파’와 해마의 ‘SWR파’가 학습과 기억에 관여하는 뇌파로 알려진 점에 착안, 이 3개의 뇌파가 상호작용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실험용 생쥐에게 특정 공간에서 30초 동안 특정 소리를 들려주다가 마지막 2초간 전기충격을 가해 전기충격에 대한 공포 기억을 심어주고 생쥐들을 3개 그룹으로 나눴다. 생쥐가 잠을 자는 동안 한 그룹에게는 대뇌피질의 서파 발생 시기에 맞춰 수면방추파를 유도하고, 다른 무리에게는 서파 발생 시기와 관계없이 다른 시점에 수면방추파를, 또다른 무리에게는 수면방추파를 유도하지 않았다.

생쥐들에게 뇌파를 유도하는 방법으로는 ‘광유전학’을 활용했다. 광유전학이란 빛을 이용해 신경세포 활성을 조절하는 것으로, 연구진은 청색 빛을 받아들이는 수용체 단백질인 ‘채널로돕신’을 생쥐 간뇌의 시상 신경세포에 발현시켜 생쥐 머리에 꽂은 광케이블을 통해 수면방추파 발생을 유도했다.

수면중에 발현되는 수면방추파와 대뇌피질의 서파, 해마의 SWR파. 이 중 수면방추파를 인위적으로 유도하면 수면 중 학습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3개 그룹의 생쥐에 대한 광유전학 조치를 하고 24시간이 지난 뒤 연구진은 3개 그룹의 생쥐를 2가지 상황에 배치했다. 하루 전 공포를 느꼈던 똑같은 공간에 소리 자극이 없는 상황A와 전날과 전혀 다른 공간에 소리가 들리는 상황B다.

연구진은 만일 상황A에서 공포를 느낄 때 바짝 얼게 되는 행동을 한다면 전기충격을 받은 환경을 기억하는 것으로 해마의 장기기억에 해당된다고 봤다. 반면 상황B에서 공포를 느낀다면 전날 들었던 소리 자극과 전기충격의 연관성을 기억하는 것으로 해마에 의존하지 않는 기억이라고 봤다.

생쥐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공간은 같지만 소리 자극이 없는 상황A에 처해진 3그룹의 생쥐 중 대뇌피질의 서파 발생 시기에 맞춰 수면방추파를 유도한 생쥐가 다른 생쥐보다 공포에 대한 기억을 2배 가까이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상황B에 처한 3그룹의 생쥐들은 공포 기억을 떠올리는 정도에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상황A가 해마의 장기기억에 해당된다고 볼 때 대뇌피질의 서파 발생 시기에 맞춰 빛을 통해 수면방추파를 유도한 자극이 해마의 장기 기억을 향상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희섭 단장은 “인간의 뇌파를 조정할 수 있다면 학습 기억력을 높이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