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0년 넘게 신규 원전 중단 후 산업 생태계 붕괴
세계 5번째 원전 수출국인 한국, 미국 간 길 따라가나

문재인 정부가 '탈(脫)원전'을 선언하며 에너지 정책의 대변환을 예고했다. 원전은 우리나라 전체 전력의 약 30%를 생산하는 주요 에너지원(原)인 동시에 수출 산업이다. 한국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한국형 원전 4기를 186억달러에 수출해 세계에서 5번째로 원전 수출국에 이름을 올렸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1979년 3월 28일 새벽 4시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스리마일 섬(Three Mile Island·TMI)에 있던 원자력 발전소 2호기에서 노심(爐心·핵분열 연쇄 반응이 이뤄지는 곳) 구조물이 녹아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밸브 장치의 이상과 운전원의 실수가 결합된 결과였다.

TMI 원전 사고로 10만여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1m 두께의 격납용기가 온전하게 차폐 기능을 수행한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사망자는 없었고 사고 기간에 발전소 부근의 방사선 노출 수준은 자연 방사선량인 100밀리렘(mrem)에도 못 미쳐 반경 16㎞ 이내 주민들은 가슴 엑스레이 촬영을 2~3번 한 수준의 방사선에만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TMI 사고는 미국의 원전 정책을 완전히 바꿨다. 원전 강국이었던 미국은 이 사고 후 30년 넘게 원전 신규 건설을 중단했고 관련 산업의 기반은 거의 무너졌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원전을 가장 많이 운영하는 나라지만, 국제 경쟁력은 러시아와 중국 등에 점점 밀리고 있다.

한국은 1978년 첫 원전인 고리 1호기의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후 원전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2010년에 미국, 캐나다,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세계원자력협회(WAN)가 인정한 세계 5번째 원전 기술 수출국이 됐다. 그러나 새 정부가 ‘탈(脫)원전’을 선언하며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미국과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아무리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린다고 해도 자국 내에서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 원전 산업은 설 땅을 잃을 수밖에 없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미국, 33년 만에 원전 확대로 선회

미국은 원자력 잠수함 기술을 이용해 1957년 10만㎾의 시핑포트(Shippingport)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고 이듬해부터 전력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Nuclear Regulatory Commission)에 따르면 시핑포트는 순수히 평화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원전이다.

미국은 원전을 대거 늘리기 시작해 1979년 TMI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129개 원전 건설 계획을 승인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면서 53개 발전소만 건설이 계속됐고, 나머지 계획은 취소됐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사고 현장을 방문해 “미국은 새 원전을 짓지 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미국은 신규 원전을 짓지 않다가 약 33년 뒤인 2012년 2월에 조지아주 보글(Vogtle) 신규 원전 건설을 허가했다. 원전 유지 정책에서 다시 확대 정책으로 바뀐 것이다. 올해 1월 기준으로 미국에서 건설 중인 원전은 4기, 계획된 원전은 18기다. 현재 운영 중인 99기 중 대부분은 1990년 이전에 지어진 것들이다.

미국이 다시 신규 원전을 짓기로 했지만 30년 넘게 자국 내 관련 일거리가 사라지자 기반 산업은 크게 약화됐다. 시핑포트 원전을 설계하고 한국의 고리 1호기를 만든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는 2006년에 일본의 도시바에 매각됐고, 세계 정상급 업체였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도 사업 부문별로 쪼개져 각각 다른 회사에 매각되며 사라졌다.

김긍구 한국원자력연구원 스마트개발사업단장은 “미국은 1980년대 이후로 자국 원전 건설을 안 하면서 원자력 산업계가 거의 도태됐다”며 “30년 넘게 GE 등 원자력 관련 업체들이 망가지면서 세계 시장을 끌고 가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했다.

◆ 한국 원전 산업 생태계도 미국의 길로 가나

한국은 1956년 한미원자협정을 맺고 1978년 고리 1호기의 상업운전을 개시해 세계 21번째로 원전 보유국이 됐다. 이후 89년까지 7기의 원전을 더 지었으나 모두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캐나다의 캔두(Candu)라는 회사가 만든 것들이었다. 한국이 처음 주도해서 만든 원전은 한빛 3·4호기로 각각 1995년, 1996년에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한국의 원전 산업은 첫 원전 도입 이후 꾸준히 성장해 2006년에 12조7995억원이었던 국내 원자력 산업분야의 총 매출액이 2015년 말에 26조6324억원(원자력 관련 매출이 있는 504개 회사 대상)까지 커졌다. 연평균 성장률은 8.5%에 달했다. 원자력 산업 분야의 인력도 2006년 2만784명에서 2015년 3만5330명으로 연평균 5.8%씩 늘었다. 원자력 산업 인력은 원전 건설·운영이 약 60%를 차지했고, 원자력 안전(12.7%), 원자력 지원 및 관리(11.9%), 원자력 연구(4.9%) 분야 순으로 인력이 많았다.

원전 업계는 국내에서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 한국의 원전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고 있다. 당장 정부 예산이 대폭 줄면서 연구 인력이 축소될 수 있다. 원자력 관련 연구개발(R&D) 예산은 매년 1500억~2000억원 안팎이다. 올해의 경우 원자력 기술 개발사업 1353억원, 방사선 기술 개발사업 363억원, 방사선 연구기반 확충사업 249억원 등 총 2340억원의 예산이 원자력 연구개발 분야에 배정됐다.

그러나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한 이상 내년도 원자력 관련 예산은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또 신규 원전 공사가 중단되면 국내 업체들은 일감이 줄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 원자력 관련 업체는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지만, 원전 건설 공사의 경우 현재 신고리 5·6호기 사업에만 1700여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내년도 예산 심의가 진행 중인데 존폐를 걱정할 만큼 예산이 삭감될 것 같다”며 “뚜렷한 대응 방안이 없어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울산 울주군에 있는 신고리원자력 발전소 모습. 오른쪽이 3호기, 그 옆이 4호기다. 3·4호기 뒤에 5·6호기 건설 현장이 있다. 신고리 3·4호기는 UAE에 수출한 것과 같은 모델이다.

◆ 원전 시장 2030년 300조원…중국은 자금까지 지원하며 수출

‘탈원전’ 정책은 원전 수출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은 1993년 처음으로 원전 운영·정비 기술 지원 계약을 수출한 뒤로 2015년까지 862건, 211억3313만달러(약 24조3559억원)의 원전 관련 수출 실적을 거뒀다. 가장 큰 규모의 수출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APR(Advanced Power Reactor) 1400’이라는 한국형 원전 4기를 186억달러에 수출한 것이다. 2014년과 2015년 수출액은 각각 1억5581만달러(1795억원), 1억5063만달러(1735억원)였다.

전 세계에서 원전을 수출한 국가는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캐나다, 한국 등에 불과하다. 주변 환경도 한국에게 긍정적이다. 프랑스의 아레바(Areva)는 핀란드 원전을 짓는 과정에서 공사비가 50% 이상 증가해 평판이 나빠졌고 웨스팅하우스는 중국에서 짓는 원전이 기술결함으로 공기가 4년이나 지연되면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추정한 원전 시장의 규모는 2030년까지 300조원, 원전 해체시장 규모는 2050년까지 1000조원이다. 현재 원전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UAE, 핀란드 등인데 특히 중국은 원전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도시바가 매각할 예정인 웨스팅하우스 인수전에 뛰어들었고 파키스탄에 원전을 수출하면서 건설 비용의 80% 이상을 지원하기도 했다. 루마니아 원전 인수전에도 자금지원을 내걸며 뛰어든 상태다. 최근에는 원전을 발주하는 나라가 재원 조달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국책은행이 함께 나서지 않으면 수주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프랑스나 미국 업체의 평판이 안 좋아진 반면에 우리나라는 UAE 원전 건설에서 모범적인 성과를 거둬 정부 지원만 있으면 러시아, 중국과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며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면 국책은행도 자금 지원에 안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수출 경쟁력은 다른 나라보다 떨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