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통신사, 단말기 제조업체의 경쟁을 촉진시키면 가계 통신비는 줄어든다. 이를 위해 '고비용 저효율'의 휴대전화 유통 시장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선비즈는 단말기 판매와 통신 서비스 판매를 분리하는 '자급제 시대 준비하자'를 시리즈를 통해 통신 유통 구조의 개선책과 자급제 연착륙 방안을 두루 모색한다. [편집자주]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이동통신사 대리점에서 휴대전화(단말기)를 산다. 휴대전화만 취급하며 판매하는 곳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 3사가 휴대전화와 통신 서비스를 묶어 팔면서 단말기 판매 유통 구조의 중심에 서게 됐다. 자연스럽게 통신 요금 및 서비스 경쟁은 사라졌다. 이통사 대리점들은 고가 요금제와 고가 단말기 위주로 팔아 가계 통신비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통 3사는 휴대전화에 주는 보조금과 대리점에 뿌리는 각종 리베이트를 무기로 휴대전화 유통 시장을 쥐락펴락했고 복잡한 보조금 체계로 휴대전화 시장은 혼탁해졌다. 일부 대리점이 ‘반짝 세일’을 벌이면 이른바 유통 대란이 일어나 불투명한 휴대전화 가격 구조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은 깊어져 갔다. 이통 3사가 전국 2만 여개에 달하는 유통 대리점망을 유지하느라 쓰는 연간 마케팅 비용 7조~8조원도 고스란히 통신 요금에 반영된다.

왜 한국에는 이처럼 ‘고비용 저효율’ 유통 구조가 정착됐을까. 중국의 샤오미처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제조회사나 오포나 비포처럼 휴대전화 회사가 오프라인 유통망을 구축하는 사례가 없을까. 원인을 알아야 해법 모색도 가능하다.

서울 시내 위치한 한 유통점 전경

◆ 이통사에 전권을 준 화이트 리스트

이통사들이 단말기 유통의 전권을 가진 것은 이통사가 각 휴대폰에 부여된 고유식별번호인 국제단말기인증번호(IMEI)를 이통사가 관리하게 한 ‘화이트리스트' 제도 때문이다. 정부는 인증받지 않은 단말기가 불법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단말기 정보를 이통사에 등록하도록 했다. 이통사들은 대리점을 통해 IMEI를 등록한 휴대전화만 서비스를 개통해줬다. 이 제도는 2011년까지 이어졌다.

한국과 달리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해외 국가들은 도난이나 분실 등 문제가 생긴 단말기의 IMEI만 따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한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단말기만 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화이트리스트 방식(왼쪽)과 블랙리스트 방식

우리 정부도 2012년부터 블랙리스트 방식을 도입하고 단말기 판매와 통신 서비스를 판매를 분리하는 휴대전화 자급제를 실시했지만, 이미 뿌리를 내린 국내 이통사 중심의 유통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김민철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은 해외와 달리 화이트리스트 방식을 먼저 도입했기 때문에 국내 단말 유통구조가 이통사 중심으로 형성됐다”면서 “블랙리스트가 도입된 2012년 이후에도 이통사들은 단말기와 통신서비스를 결합 판매하며 유통권을 놓지 않았고 자급제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제조사들도 이통사 중심의 단말 유통구조를 선호했다. 이통사들이 대신해 단말기를 유통해주는 데다 고가 폰을 판매하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국내 한 단말기 제조사 관계자는 “제조사가 이통사와 단말기종, 출고가격 설정 및 거래 조건 등에 대한 협의를 거쳐 이통사 대리점망을 통해 출시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자급제 도입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 멀고 먼 자급제의 길

자급제는 소비자가 이통사를 통하지 않고 대형 마트나 쇼핑몰에서 직접 스마트폰을 마련(구매)하는 제도다. 정부는 고가 단말기와 고가 요금제를 묶어 파는 이통사 중심의 유통 구조를 바꾸기 위해 2012년 자급제를 실시했지만, 자급제의 실익이 없어 소비자들이 외면했다.

이통사 대리점에서 단말기를 구매할 경우 제조사와 이통사가 보조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실 구매 가격이 낮은 반면, 소비자가 직접 구매할 경우 보조금이 없어 실구매 가격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통사들은 가입자들이 직접 단말을 구매할 경우,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한때 이통사에 IMEI 정보가 등록돼 있지 않으면 롱텀에볼루션(LTE) 서비스가 지원되지 않았고 3세대(G) 통신 서비스만 이용 가능했다. IMEI 정보 등록 없이는 장문의 메시지(MMS) 이용도 불가능했다. 결국 가입자들은 이통사에 별도의 IMEI 정보를 등록해야 하는 번거러움 때문에 이통사를 통해 단말을 구매하게 됐다.

단말기 자급제 시행 이전(왼쪽)과 이후 비교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ICT소비자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애플 온라인스토어의 스마트폰 직접 판매 가격과 이통 3사가 판매하는 출고가를 비교한 결과 삼성전자 갤럭시 시리즈는 평균 10%, 애플 아이폰은 평균 9% 가량 제조사의 판매가가 이통사의 판매가보다 더 비쌌다.

윤문용 녹색소비자연대 국장은 “이통사는 제조사로부터 대량으로 단말기를 구매하기 때문에 단말기 가격이 저렴해진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제조사가 의도적으로 이통사에 주는 가격을 낮춰 소비자들이 이통사 대리점을 찾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2015년 4월부터 선택약정 요금 할인 제도의 요금 할인율이 20%로 올라가면서 이통사 중심의 유통 구조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선택약정 요금 할인 제도는 제조사와 이통사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고 단말기를 구매하면 통신 요금의 20%를 할인받을 수 있도록 강제한 것이다. 휴대전화 보조금 대신 요금 할인을 선택하는 가입자 수가 1500만명까지 증가했다. 문재인 정부의 국가기획자문위원회는 이 할인률을 25%까지 올리겠다는 방침이다.

윤 국장은 “고가 약정요금제와 고가 프리미엄 단말기 위주의 이통사 중심 유통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급제가 시행돼야 한다”면서 “자급제를 시행하면, 여러 종류의 스마트폰이 국내에 유입되고 단말기 종류해 단말기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택 약정 요금 할인 제도의 할인 비율이 높아지면, 소비자들이 휴대전화 보조금을 주는 이통사를 통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구매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서 “선택 약정 요금 할인제도가 자급제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고 덧붙였다.